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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광고]한국정신문화의 원류, 書院을 찾아서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임호서원(臨湖書院)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서 신덕리로 넘어가는 길목 오미산을 배산으로 하고 넓게 펼쳐진 평지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임하1리는 많은 문화재와 고가옥을 보유한 마을이다. 오류헌, 양동댁, 이우당종택, 안동임하동종3층석탑, 호계서원, 사빈서원, 안동임하동십이지삼층석탑 등 지정문화를 비롯하여 송석재사, 원림사지석불좌상, 와룡정사, 길헌, 학산정 등을 비롯한 비지정문화재가 있는데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도 있고 또 안동댐과 임하댐 건설로 인해 이건한 것도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790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1707년(숙종 33)에 창건되어 운천(雲川) 김용(金涌)을 제향하고 있다. 당초 임천서원(臨湖書院) 이건 후 구지(舊地)에 강당을 세워 덕봉서원(德峯書院)으로 중건하였으며, 1853년(철종 4년) 임호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1년 현 위치로 옮겼다. 현재 임호서당(臨湖書堂)이라는 현판이 강당 내부와 외부에 게판되어 있다.

◇구조
강당으로 쓰이는 임호서당과 아양루(我洋樓)가 1921년 건립된 후 1981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사주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경내에는 강당과 동재가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상부구조는 5량가이다. 중앙의 3칸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았고, 후면에는 쌍여닫이판문으로 꾸몄다. 마루의 좌우에는 방을 연결하고 전면에 쌍여닫이창을 내고, 측면에도 외여닫이문이 있다. 마루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어, 마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방으로 출입할 수 있는 외여닫이문이 나 있다. 기둥은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고, 2벌대의 기단위에 건물을 앉혔다.

◇동재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2칸에 마루를 들였다. 마루전면은 들어열개 사분합문을 달고, 후면으로는 쌍여닫이판문으로 하였다. 마루의 좌우에 방을 연결하고 전면에는 쌍여닫이문을 내었다. 방들의 측면은 채과을 위한 창만 달았다. 강당에도 사용하지 않은 두리기둥을 동재에 쓴 것과 동재의 평면구성이 서원의 일반적인 강당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배향인물
·김용(金涌), 1557-162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운천(雲川). 수일(守一)의 장자. 1590년(선조 2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증자(承文院正字)로 등용되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역임 중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으로 향군을 일으켜 고장을 지키다가 그해 가을에 왕이 파천해 있는 의주(義州)로 올라가서 예문관의 검열(檢閱)·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했다.
환도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간(司諫)·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며 과연 학봉(鶴峯)의 조카답다는 칭찬을 들었다. 1504년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인사를 처리함에 극히 공정했으며,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올라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했다.
1597년 정유왜란(丁酉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독운어사(督運御史)를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모함을 받아 삭직 당하자 함께 북인(北人)의 배척을 받고 선산부사(善山府使)·예천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다가 1609년(광해군 1년) 태상시정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이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고, 1615년(광해 7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하(臨河) 임호서원(臨湖書院, 舊 德峯書院)에 제향되고, 저서에 《운천집(雲川集)》《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등이 있다.

□김용호종일기(金涌扈從日記)

조선 중기의 문신 김용(金涌)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하였을 때 쓴 일기. 1593년 8월 8일∼12월 4일(필사), 보물 제484호. 3책. 필사본. 이 책은 초서로 쓰여졌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을 때 직접 체험하고 보고 들은 사실들을 그대로 기록한 일기로, 1593년 8월 8일부터 12월 4일까지의 기사이다.
사생활은 물론, 국가의 정치·군사·외교 등 각 방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1977년 그의 시문집 『운천집(雲川集)』등과 합본하여 영인, 출간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있는 의성김씨 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운천(雲川)의 가르침과 신도비
-운천(雲川)선생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궁하더라도 의리를 잃지 말고 출세하더라도 도를 버리지 말라(窮不失義達不離道)”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지금까지 의성 김씨의 문중훈(門中訓)과도 같이 내려오는 구절인데, 그 주인공이 바로 운천 선생이라는 데서 선생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운천 선생의 묘소는 안동시 임동면 지리 있는데, 이곳에는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지동재사)와 신도비가 있다.
선생의 묘비는 이수 부분의 조형이 보이며 면 앙부를 다시 깎아 새로 새긴 모습이 특이한데, 아마도 추증이재차 이루어져 다시 세우지 않고 비면을 깎아 새로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을 찾으면 재사와 신도비 그리고 독특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묘비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집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운천 선생의 주손이 사는 집은 청계 선생의 둘째 아들인 귀봉 김수일 공의 종택이다.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운천 선생의 임진왜란 시 호종일기가 보관되어 있다.
이 일기는 보물 제4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에는 내앞 작은종가로 불린다.
운천 선생의 신도비는 고종(高宗) 29년(1892)에 세워졌다. 신도비의 총 높이180cm, 가로 72cm, 세로 114cm의 좌대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이수의 높이는 64cm이고 화강석(花崗石)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재 권연하(權璉夏, 1813-1896)가 짓고 김한락(金翰洛)이 썼다. 지동재사(枝洞齋舍)는 운천(雲川) 김용(金涌,1557-1620)선생과 그의 부인(夫人) 이씨(李氏)의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인조(仁祖)17년(1639)에 건립한 것이다.
정면 4간, 측면 5간의 ㅁ자형 팔작 및 박공집으로 전형적(典型的)인 재사형 건물 양식으로 매우 검소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김용(金涌)김성일의 조카이녀 김수근의 아들이고, 부인은 퇴계 이황의 손녀이다. 현재 안동의 덕봉서원, 묵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진주대첩의 숨은 영웅 학봉 김성일의 조카인 운천 김용은 난중일기에 두 번 등장한다. 김용이 체찰사종사관 때 비변사 낭청으로서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구두로 선조의 뜻을 전하는데 김응서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유지(有旨)를 전해온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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