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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광고]한국정신문화의 원류, 서원을 찾아서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동산서원(東山書院)
동산서원은 1961년 3월 경북 안동시 용상동 1293번지에 사암(思菴) 천만리(千萬里)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이 지역 유림들의 의견에 따라 1962년에 준공되었으며, 영양 천씨 종회 소유이다. 같은 해 10월 26일에 914명이 모여서 첫 향례를 올리고 매년 음력 3월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행사(行祀)하다가 사회적인 여건의 변동으로 1976년(丙辰)부터 3월 중정일에만 행사하고 있다.
안동댐 민속박물관 앞 주차장을 지나서 빈집으로 남아있는 민속촌 언덕길을 오르면 ‘왕건’ 촬영장이 있고, 그곳을 지나가면 2002년 새로 중건한 성곡동 고가옥박물관 내로 이건한 동산서원이 나온다.
천만리는 조선 중기에 명나라에서 귀화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이끌고 참전해 큰 전공을 세웠다. 중국의 장수가 조선 사람의 발의로 서원에 배향되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봉사하고 있다.

◇연혁
동산서원(東山書院)은 1961년(辛丑)에 영정(影幀)을 모실 뜻으로 안동시 용상동에 사당 3칸과 강당 10칸을 세워서 다음해인 1962년(壬寅) 8월 18일에 도내 유림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때에 위판(位版)을 모시고 향례(享禮)를 드리자고 결의되어 호계서당(虎溪書堂)에서 각 서원과 각 문중에 통문(通文)을 발송하였다.
1962년(壬寅) 9월 23일에 향중 유림회의에서 서원의 총호(總號)를 동산서원(東山書院)이라고 하고 사당은 충장사(忠壯祠) 강당은 상의당(尙義堂) 정문을 유정문(由正門)이라고 결정하였다.
2002년(壬午)에 안동시의 도시계획 추진으로 서원의 부지가 도로에 편입됨에 따라 안동시 성곡동 민속촌 안으로 옮기면서 동·서재(東·西齋) 동재는 원선재(援善齋) 서재는 과의재(果毅齋)를 중축하였다.

◇구조
제일 아래쪽에 유정문(由正門)을 들어서면 깨끗이 단장되어 잘 보존된 건물들과 조경석 곁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강당인 상의당(尙義堂),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동재 원선재(援善齋)와 서재 과의재,(果毅齋) 그리고 유정문(由正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의당은 10간에 팔작지붕이며, 충장사는 3간에 맞배지붕이다. 동재는 1간, 서재는 2간이며 맞배지붕이다.

◇사당
사암(思菴) 천만리(千萬里)선생을 모신 사당 충장사(忠壯祠)는 단청이 선명하게 그려진 맞배지붕의 합문을 지나 총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서원 뒤로 한 층 높여 지었다.

◇강당
서원 본채인 상의당(尙義堂)은 총10칸으로 양편으로 2칸씩의 온돌방이 있고 중앙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었고 하늘을 휘감은 전통 조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자연의 지형을 이용해 삼층으로 구분, 중앙 층에 동산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동재·서재
서원의 대문 양쪽에 마주볼 수 있는 동재 원선재(援善齋)는 1칸이고, 서재 과의재(果毅齋)는 2칸이며 맞배지붕이다. 이건하면서 동·서재와 정문을 증축하였다.

◇배향인물

·천만리(千萬里, 1543~ ?)
성은 영양천씨(潁陽千氏)이고 휘는 만리(萬里)이고 자는 원지(遠之)이고 호는 사암(思庵)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고 군호는 화산군(花山君)이다. 1543년[가정(嘉靖)-계묘(癸卯)] 8월 1일에 중국의 노(魯)나라 영양(潁陽)에서 시강원교관(侍講院敎官)을 지낸 아버지 천종악(千鍾嶽)과 어머니 전씨(錢氏)부인에게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선생을 잉태할 때 멀리 떠나서 살 태몽이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이름을 만리(萬里)라고 지어서 만난로정(萬難路程)의 뜻을 담았다 아버지는 모함을 입어 광원(廣原)에 귀양가서 살다가 1550년에 귀양지에서 양억(楊檍)의 반란군과 싸우다가 호암(虎 )의 절벽에서 전사하니 선생이 8세 때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니 외숙부 전윤(錢倫) 공부상서(工部尙書)에게서 길러졌다.

1555년 2월에 과거(科擧) 황태자탄생축하특명시(皇太子誕生祝賀特命試)에 13세의 나이로 급제하였으나 연령 미달로 부름을 받지 못하고 특별히 황제를 알현하고는 광원(廣原)에 아버지 천종악(千鍾嶽)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우고 충의사(忠義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다음해에 영녕백(永寧佰) 허언(許彦)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1571년에 무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1575년에 북방경비의 책임자인 북로총절사(北路總節使)가 되었는데 그해 10월에 오부추장(五部酋長)으로 편성된 13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1천의 군사로 대적하여 이부추장(二部酋長)과 2만의 적을 섬멸하고 물리첬다. 이 공로로 다음해 2월에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의 중책을 맡았다.

1580년에 직패금(織貝錦)이란 소인배의 무고를 입어 양릉(楊陵)에서 8년간을 귀양살이를 하고 1588년에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 겸 총독오군수(總督五軍帥)가 되었다.
1592년 (宣祖25-壬辰) 임진왜란에 중국 지원군의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의 직함으로 이여송(李如松)제독과 함께 출정하였다.

1593년 1월에 첫 전투인 펑양전에서 승리하고 4월에 서울에 입성하였고 이어서 남원(南原)의 숙성령(宿星嶺)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강화협상(講和協商)으로 5년간을 대치상태로 지내오다가 협상이 결렬(決裂)되자 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이어진다.

이 때 선생은 죽산(竹山-안성부근)에 주둔하였다가 9월에 직산(稷山-천안 윗쪽)으로 올라오는 적의 선봉을 꺾음으로써 서울이 무사하게 되는 대승을 거두었고 퇴각하는 적군을 따라가면서 격파하고 이듬해 1월에 1차 울산성 전투에서는 울산성을 포위하고 총력전을 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9월의 2차 울산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적군을 퇴각시켰다.

1598년 4월에 명나라 군대가 개선할 때 잔류부대 2만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만세덕(萬世德) 조승훈(祖承訓)과 함께 남았었고 9월에 철수할 때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그대로 머물렀다.
아마도 출정할 때 이미 가족을 대동한 사실로 보아서 출정하면서 조선에서 살기로 작정하였을 것이다. 이미 기우는 명나라의 국운과 청나라의 지배를 짐작하여 오랑캐의 풍속에 젖지 않기 위하여 선택한 길일 것이다.

선생의 학문에 관하여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으나 13세의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문집에 남아 있는 시(時), 문(文), 자서(自敍), 동정사실(東征事實), 백사(白沙-李恒福) 한음(漢陰-李德馨) 등과 교유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학문에도 상당한 조예(造詣)가 있었을 것이다.

1617년 (光海君9-丁巳)의 유서(諭書)에 『임란일등공신(壬亂一等功臣) 화산군(花山君)의 은덕과 공훈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니 이 나라가 그 충훈(忠勳)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고 토지 30결(結)과 돈 100냥과 승마 1필과 노복 1구를 하사한다. 그리고 혹시 자손 중에 굶주림을 당하면 나라에서 구휼(救恤)할 것이고 후손을 높이 등용할 것이며 후히 대하라고 곁들였다.

1620년(光海君12-庚申)에 숭정대부(崇政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의 교지가 내렸다. 1868년(高宗5-戊辰)에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렸는데 가정을 잊고 나라를 염려함을 충이라 (慮國忘家日忠) 하고 적을 이겨서 난리를 극복함을 장이라(勝敵克亂日壯) 하였다.

대보단(大報壇)에 배향되고 고성(固城)의 호암서원(虎 書院) 청도(淸道)의 황강서원(皇岡書院)에 봉향되었다.

◇활동사항

동방 땅은 황제의 영토이거니(東土惟皇地)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 똑같네(情同一國人)
천추토록 그 덕 갚기 어려웁나니(千秋難報德)
온 천하의 티끌 모두 씻어내었네(洗盡八方塵)

-천만리(千萬里)에게 주다.

학봉일고 2권 시편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학봉 김성일 선생께서 임란당시 경상도 초유사로 있을 때 명군으로 참전하고 있던 천만리 장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은 드라마 징비록에서 보듯이 기개가 높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그의 눈에는 풍신수길이 한낱 쥐에 불과 했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 초유사로 민심을 안정시키고, 진주성 전투 등을 진두지휘했으며, 2차 진주성 전투 때 병으로 사망하였다.

천만리는 명나라의 수위사 겸 총독장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고 귀화하여 한국 영양 천씨의 중시조가 된 장군이다. 묘는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있다.
아버지는 천종악(千鐘嶽)이며, 어머니는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딸이다. 9세에 외삼촌 전륜(錢倫)에게 의탁되어 공부하였다.

1571년(28세)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1575년에 총절사가 되어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내직인 내위진무사가 되었으나, 남의 참소를 입어 양릉에 귀양살이하였다. 8년의 귀양살이 후에 태청전수위사와 총독오군사를 겸직하였다. 태청전수위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1592년(49세)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 두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와 함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와서 군량 수송업무를 관장하였다.

철기(鐵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제독 이여송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곽산에서 첫 전투를 이긴 다음, 평양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포위하였다. 제3차 평양 전투에서 칠성문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짝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 승세를 타고 싸운 결과 1,280여 급(級)을 참획하였다. 계속 싸우면서 동래에까지 이르는 동안 연전연승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어놓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마귀 제독을 따라 파병되어, 중사마로서 일본 군사와 직산에서 싸웠는데, 매복하였다가 들이치자 적들은 풀대 쓰러지듯 하였으며, 울산까지 도망치는 적을 승세를 타서 곧바로 무찔러 버리고 그 공로를 서생진의 층암절벽에 새겼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33) 8월 만세덕, 이승훈은 귀국하였으나, 그는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왕경에 머무르면서 금강산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다. 대체로 천만리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땅의 고신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하여 자헌대부로 봉조하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에 봉하여 전(田) 30결을 급복하였으며, 그의 장남 천상은 한성부좌윤, 차남 천희는 평구도찰방으로 승진시켜 자손에게 세록을 전수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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