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샐러리맨에서 굴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경북을 “대한민국 행복 1번지”로 만들겠다


더불어 민주당 경북도지사 후보로 공천된 오중기 후보는 포항시 죽도시장에서 자라고 박근혜 대통령이 재단이사장이었던 영남대학교를 졸업했다.

갓 스무 살이던 대학시절, 전두환 독재에 맞설 것을 선택하고 젊은 청춘을 고스란히 최루탄과 아스팔트에 묻었다.

박근혜 재단이사장 퇴진운동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 치하에서 온몸으로 싸운 것이 그의 첫 정치였다. 1987년 6월,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후 그는 생업을 위해 한국일보 업무직에 취업, 사회 첫발을 내딛고 동아일보로 이직하는 등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았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를 접하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가족들의 만류에도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왔다.

2008년 총선, 대통령선거 참패 후 모두 떠나버린 MB의 고향인 포항 북구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오중기 후보는 그렇게 나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5% 득표로 참패한 것이 그의 첫 출마 기억이다. 선거비용조차 보전 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또 4년을 다시 준비했다.

4년 뒤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2012년 총선,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까지 확정됐지만 '연대하고 통합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야권연대를 실천하고 포항북구 후보자직을 내려 놓는 등 정치인으로서 연이은 실패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경북의 민주당을 지켜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하늘을 찌를 때 민주당 경북도당위원장으로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을 택하고 민주당 확장에 매진했다.

그리고 오중기 후보는 “5% 짜리” 후보에서 경북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안고 4번을 연이어 경북도당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2012년 대선 패배로 흔들리던 민주통합당의 비상대책위원을 맡아 대선패배 후 당을 추스르는데 노력했다. 그야 말로 경북에서 민주당을 재건하는데 최근 5년을 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대표이던 시절 당의 혁신안을 추진하는데 가장 앞에서 주장하던 이가 오중기 후보였다. 그리고 탄생한 것이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다.

오중기의 도전의 역사에 또 하나의 중요한 기회가 온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름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장하성 정책실장과 함께 국정 정책을 아우르는 선임행정관으로써 말이다.

인수위도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하던 그에게 또 다시 당원들의 부름을 받고 경북도당 돌아왔다. 비록 짧은 근무기간이었지만 영주의 베어링산업단지 조성을 비롯해 각종 경북의 현안을 챙기던 그가 이제 경북도지사 후보로 다시 현장에 서게 되었다.

마침내 변화, 마침내 오중기! 라는 슬로건으로 경북을 “대한민국 행복 1번지”로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현장을 누비는 그이다.

“능력 있는 진보”, 오중기 후보의 모토이다. 민주당에서 경북도당위원장 4선, 중앙당 지도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경험까지 두루 섭렵한 오중기 후보, 능력 있는 도지사가 되어 경북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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