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편집국장

홍매화가 활짝 피었던 삼월도 가고, 화려하게 뽐내던 사월의 벚꽃도 순식간에 졌다. 곧 아까시꽃이 온 산천에 피어날 것이다. 아까시꽃이든, 이팝꽃이든 꽃잎이 하얗게 흩날리는 꽃그늘 아래서의 기다림은 아름답다. 친구를 기다리던지, 아니면 그 누군가를 기다렸던 옛 기억을 떠올려 보는 것은 황홀한 설렘이다.

기다리는 동안 한 생(生)이 모두 지나가 버릴 것 같은 오월의 하루.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꽃잎은 소리 없이 소멸하겠지. 꽃잎의 한계는 내가 꽃잎을 사랑하는 순간뿐이다. 한계를 사랑해야 지난 삶을 이해할 수 있음을 지천명(知天命)이 지나서 이제는 안다. 인생에 대해, 지난 시간에 대해 더 이상 고개를 돌리고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꽃그늘 아래에서 얼마를 기다려야 많은 꽃들이 지고, 인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오월의 비바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오월 초입에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장대비에 아스팔트에도, 콘크리트 바닥에도 투명한 물꽃은 화려하게 피었다가 진다. 무슨 곡인지도 모르면서 감미로운 음성과 기타소리가 그저 좋아 팝송을 틀어놓고 음률에 따라 손이 움직이는 대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려본다.

왠지 외롭다. 가슴이 텅 빈 것 같고 허전하다. 왠지 슬프다. 목 놓아 소리내어 울고 싶어진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오는 소리를 받아 적는다.

조금 전부터 계속 울려대는 휴대전화는 내 마음과 거리가 먼 일들을 전해주며 나를 더욱 우울하게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한 가슴 활짝 열어놓고 마음껏 주절거리는, 하소연을 부담 없이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다.

주룩주룩 내리는 오월의 비를 의미 없이 바라보면서도 차 한 잔 편하게 같이 마실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그리움이다. 애타게 기다릴 때 내리면 행복하지만, 기다리지 않을 때 내리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진정 그리움에 목이 타들어갈 만큼,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나에게 정말 간절한지, 다시 냉정히 생각해봐도 느낌은 매한가지다.

사람이 그리운 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그리운 날. 비록 날씨는 흐리지만 잠깐씩 비치는 햇살 사이의 맑은 하늘을 보며 슬프고 우울한 마음을 스스로 추슬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슬픔에서 벗어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계획에 없던 독서, 음악듣기, 잠시 동안 단잠자기를 즐기는 것도 삶을 즐겁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또 나에게 진정 그리운 것은 무엇인지를 떠올리며 문장으로 나열해 본다.

외롭다고 쓴다. 어두운 것이 좋다고 써본다. 사는 것이 슬프다고 쓴다. 세상은 눈물이다고 써본다. 울고 싶다고 써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하늘을 본다. 맑은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호수보다 맑은 하늘 속으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몇 번의 오월 하늘을 만났는지를 생각한다. 햇살이 비치는 부엌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먼지 알갱이를 헤아리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본다.

부엌의 봉창에서 안쪽으로 비치던 빗살무늬 햇살. 그 사이로 먼지는 둥둥 떠 다녔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수없이 떠다니던 햇살가루 같은 먼지를 헤아렸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사람치고 시골에서 땔감으로 밥을 짓고 쇠죽을 쑤어본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이런 추억들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마는 그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밥을 짓고, 메케한 연기 속에서 잔기침을 연신 토해내었던 토담 부엌. 땔 것마저 넉넉지 않아 짚을 땔감으로 사용했던 그 시절. 뉘엿뉘엿 햇살이 질 때 조그만 부엌 봉창 속으로 스며들던 햇살. 아, 그 시절이 아득히 그립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노루 꼬리만큼 남은 앞산의 지는 햇살을 보며 산그늘을 눈으로 바라보면, 산그늘은 눈금으로도 쉽게 그어질 수 있었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런 눈금 재기를 하며 산그늘과 앞산의 나무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이제 언제 그런 세월, 그런 시간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에게 진정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지난 세월 뒤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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