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실바노)계산성당 주임신부

어릴 때, 가끔 어른들은 이상한 질문을 하곤 했다.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편 가르기를 하는 것처럼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아이는 늘 당황스럽다. 엄마가 더 좋다 하면 아빠가 슬퍼할 것이고, 아빠가 더 좋다 하면 엄마가 슬퍼할 것이기 때문.

어떤 때는 아이의 그때그때 심정에 따라 엄마가 더 좋게 느껴질 수도 있고, 아빠가 더 좋게 느껴질 수도 있기는 하지만 더군다나 엄마, 아빠가 옆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면 절대로 어느 한 편을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의 대답은 늘 하나뿐이다. “둘 다 좋아요!”(둘 다 싫다면 충격이다.) 어른들 기대에 어긋나는 맛없는 대답이기는 하지만 가장 현명한 대답이다.

왜? 아이에게 있어서 엄마, 아빠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만의 아이도, 아빠만의 아이도 아닌 엄마, 아빠의 아이인 것이다. 구별은 어른들 만의 몫이다. 살다보면 사람들은 가끔씩 구분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 번 발음을 시켜 보자.) “네 것”과 “내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둘 다 “내 것”으로 발음을 한다. 어쩌다가 “네 것”을 발음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 것”도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 되어버렸다.

언어가 바뀌게 되니까 사람들 생각도 바뀌고 생각이 바뀌니까 행동도 바뀐다.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죄이다.
원죄는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구별하는 못하는…. 하느님의 것을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죄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느님을 떠보는 어리석음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마태복음 22,15-21.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예수님을 떠보려는 일종의 교만이 숨겨져 있는 질문이다. 대답을 잘 못했을 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인간의 (궁리가) 계략이 담겨진 질문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이 대답으로 교만에 빠진 사람들의 계략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가르쳐 주신다. 사실 내 것, 세상의 것이 따로 어디 있는가? 그게 다 하느님의 것인데…. (왜 내 것인 양…) 내가 하느님의 것인데,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이런 때를 되돌아보자.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갑자기 잃게 되었거나, 빼앗겼을 때, 그 때 심정이 어떠했는가? (분노하고, 허탈하고, 아프고,…)
그런 우리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것이라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받은 생명과, 능력과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은 본래 하느님의 것인데 자꾸 그 모든 것이 내 것인 것처럼 그래서 그 욕심 때문에 재주부리고, 속이고, 시험하고 하느님마저도 돌려세우려고 하는 교만에는 빠지지 말자. “내 것, 네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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