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미 소리마당 국정국악원장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아주 특별한 여름이다.
며칠 전 영일대해수욕장에서 공연 리허설을 준비하면서 타는 듯 한 모래 위를 버선발로 뛰어다니는데 문득 창원에서 신혼생활을 할 때가 생각났다. 신혼집 2층 베란다에서 7월의 뜨거운 햇살을 이기고 꿋꿋이 살아남은 게발선인장이 말이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은 건강상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었고, 나는 어른이 된 후로 가장 힘든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였다. 결혼 후 금방 아기를 가져 몸은 으슬으슬 춥고, 새 학기여서 신경 써야 할 곳도 많았다. 거기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멀었던지, 오전 6시에 집을 나서서 창원에서 마산까지 시내버스로 거기서 창녕까지 시외직행버스를 타고 또 마을버스를, 이렇게 3번을 갈아타고 창락국민학교(초등학교)까지 8시40분이 되어야 교문에 도착했다.

결혼 전에는 그때 만해도 시골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자가용으로 친정아버지가 편히 출퇴근을 시켜주는 부잣집 둘째딸 새침데기로 동네가 다 아는 게으름뱅이였는데…. 내 처지가 너무 기가 막혀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핀 진달래만 봐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거기다 아프다고 누워있는 남편을 보고 있노라면 끝도 없는 암담함에 안 좋은 생각만 났다. ‘큰고모 팔자를 닮아서 이런가’ 나이도 얼마 안 된 나는 팔자타령을 하면서 속으로는 눈물을 삼키면서 그래저래 또 씩씩하게 매일 똑같은 일과 길을 반복하며 맏며느리의 소명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나마 학교에 출근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유일하게 숨통을 트이는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 가정방문이 필수적으로 시행되던 때라 시골 작은 동네에 가가호호 방문 중 어느 집에서 예쁘게 꽃을 피운 게발선인장을 보게 되었다. 내가 예쁘다고 감탄을 하니 학부모가 스스럼없이 한 가지를 똑 잘라 그냥 물만 주면 산다고 하며 신문지에 둘둘 말아줬다.

2층 신혼집은 가구 몇 개와 피아노 한 대만 덜렁 있었고 거실에는 화분 하나 없이 썰렁한 분위기였다. 남편은 늘 우울한 상태여서 말을 거는 것조차 부담되어 어느 한곳 의지할 곳 없었던 나는 화분에 심어놓은 게발선인장을 퇴근만 하면 쳐다보고 눈도장을 찍고 망연자실 풀포기에 마음을 줬다. 그러던 중 남편은 포항으로 취직이 되어 가고 나는 임신 중이어서 몸만 빠져 나와 방학 때 이사를 하려고 친정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 달 쯤 지나 7월 한여름에 창원 신혼집에 이삿짐을 싸려고 갔는데 세상에나 그 게발선인장이 멀쩡히 살아 나를 반겨 주고 있었다. 창문은 꽁꽁 닫혀져 있어 공기순환도 안 되고 물도 한 방울 주지 않았는데…. 가장 힘든 시기에 위로가 되어준 게발선인장이 뜨거운 여름 햇살에 시들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살아준 것이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게발선인장은 포항으로 같이 이사 와서 고목에 까까우리만큼 튼튼하게 자랐다. 점점 큰 화분으로 자리를 옮겨 수양버들처럼 휘어져 꽃을 피웠는데 설날에 시댁에 내려가면서 남편이 창문을 닫지 않아 그만 얼어 죽고 말았다. 죽은 게발선인장 화분을 붙들고 남편에게 온갖 화풀이를 다 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지난 25일 진행된 포항국제불빛축제 개막식전행사 창작국악소리극 '포항! 쾌지나 song song나네' 공연을 하면서 그 게발선인장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겨냈는데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이번 불빛축제 개막식전행사 공연을 준비하면서 제자님들에게 말로는 “아이고 덥네, 덥네” 했지만 게발선인장이 살아남은 그 해 여름을 생각하면 이또한 즐거운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일이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을 뚫고 진행된 연습과 리허설, 해질 녘 바다의 노을을 배경삼아 치러진 공연,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공연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포항의 힘을 다시 한번 모으고 그 잠재력을 느끼게 해준 공연이 되어서 나 또한 뿌듯하다.

평생 잊지 못할 게발선인장의 추억!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난다. 하지만 어떤 일에도 어느 순간에도 지치지 않을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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