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성능 좋은 스피커를 장만했다. 노래방을 설치하기 위해서다. 좋은 장비를 마련했으니 기대도 크다. 그러나 나이 들어 청력이 떨어진 허름한 장비(귀) 탓일까. 도무지 소리는 왕왕 이지러지고 귀만 아프다. 반주음악도, 내 귀도 본래 성질을 잃고 과잉되어 부서지기만 한다. 스피커에서 물러나 볼륨을 이리저리 조절해 본다. 거리감이 생기자 과밀하게 팽창했던 달팽이관이 서서히 안정을 찾는다. 반주 또한 본래의 선율을 또렷하게 되살린다. 장비는 변명에 불과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먹먹해졌던 고막도 환하게 밝아진다. 스피커와 딱 이 정도의 거리. 가장 온전하고 적당한 거리에 의자를 놓는다.

오래 전, 집을 지었다. 낡고 좁은 공간에 부대끼며 살던 대가족의 불편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적은 돈으로 튼튼한 집을 짓고 싶은 건 모든 건축주들의 마음이 아니던가. 고심 끝에 육 개월 완공을 계획하고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자재를 사다주고 각 파트마다 사람을 물색해 맡기기로 결정하면서 고난은 시작되었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울 줄 모르고 전면에 나섰던 게 화근이었다. 그때 경험도, 겁도 없이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어렵고도 두려운 범(?) 같은 존재들이었다고나 할까. 일을 부탁하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마치 하룻강아지와 범의 관계처럼 먹느냐, 먹히느냐의 살벌하고도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기 싸움의 원천.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 관계의 거리에 있었다.

최고라고 찾아간 설계사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무뚝뚝했다. 남의 말에 눈을 감고 경청하는 태도 역시 무성의해 보였다. 실망스러워 의뢰 결정을 미루었다. 그러다 다른 일로 그를 만나 대화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말이 없는 것은 일에 임하는 진중함이었고 눈을 감고 경청하는 것도 심각할 때 하는 그의 버릇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어떤 기름기 같은 게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설계비의 절감과 대가족을 감안한 실용적인 공간 활용을 주문했다. 그 또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한 설명을 곁들여 의뢰인의 까다로운 주문에 동의해 주었다. 설계사와 의뢰인의 딱 그만큼의 거리. 그 팽팽하고도 긴장감 있는 거리 유지에서 나온 설계도면은 그도 나도 흡족했다. 범과 하룻강아지의 사이도 무탈했다.
살던 집을 부수고 터파기를 하려 중장비가 왔다. 까맣게 그을린 중장비 기사의 얼굴 어딘가에 낯익은 모습이 설핏 보였다. 초등학교 친구였다. 소꿉친구라 믿고 맡기니 현장에 꽂혀 날을 세우던 내 팽팽한 신경 줄이 다소 느슨해졌다. 그런데 잘해주고픈 친구의 의욕이 지나쳤을까. 아뿔싸. 터파기를 하던 친구가 그만 대형 수도관을 건드려 삽시간에 집터는 커다란 웅덩이로 변했다. 더 잘 해주고 싶었던 마음과 잔소리로 들릴까봐 수도관이 있는 자리를 미처 일러주지 못한 두 친구는 사색이 되어 동시에 물웅덩이를 들여다보았다. 시꺼먼 웅덩이 속은 분란만 생길 것 같은 범과 하룻강아지의 뜨거운 속내 같았다.

한때 집짓기가 중단되는 최악의 상황도 있었다. 설비, 미장, 전기공사 하는 그들은 만났다 하면 고성이 오가고 연장이 날아다녔다. 순서 없이 일을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고 그 문제는 모두 내 탓이 아닌 네 탓으로 돌렸다. 그들에게 일의 순서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오고 싶은 날, 시간 나는 날이 작업하는 날이었다. 그러다보니 일은 뒤죽박죽이었다. 깨끗이 미장된 바닥을 뒤늦게 나타난 보일러공이 부족한 작업을 한다고 깨냈다. 설치한 배관이 좁다며 전기공이 벽을 두들겨 선을 빼내기도 했다. 모든 게 네 탓으로만 시작된 공사는 결국 모두의 탓으로 끝날 심각한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더 이상 진전은 없었고 완공을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하룻강아지는 겁 없이 범을 향해 정면 공격에 나섰다. 사람과 사람과의 그 애매한 관계의 거리. 그 중심에는 복잡한 감정과 이해득실이라는 미묘한 것들이 얽혀있었다.

삶이 팍팍하다. 도처에 가짜로 으르렁거리며 등장하는 범들 때문에 오금이 저린다. 그러나 사실 나는 너를 범이라 여기고 너도 나를 범이라 여길 뿐. 정작 범은 어디에도 없다. 범은 그저 내 마음속 어떤 부담감이나 두려움을 먼저 내세운 공포의 표상일 뿐이다. 실제 그 편에선 아무 내색도 시늉도 안 하는데 지레 힘에 부쳐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우리의 마음상태가 아닐까.

정작 내가 마주친 건 범이 아니라 어쩌다 비슷한 상황을 맞아 이편과 똑같이 좌불안석에 놓여버린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나도 보호받고, 상대도 보호받을 수 있는 온전한 관계의 거리. 그것은 스스로를 찌르고 남을 발가벗기는 행위가 아니라 절대적인 자기애로 타인까지 끌어안는 순연한 덕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도, 가장 큰 괴로움을 주는 것도 사람들과의 관계이니 인생의 요원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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