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 초상 (金璡 肖像).
초상화는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으로 역사나 풍속의 연구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동양의 초상화는 단순히 인물을 그리는 데만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도 옮겨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고분벽화에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회화분야로 이어졌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초상화는 문헌 기록이나 현존 작품 양면에서 볼 때 빈약하다.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왕 및 왕후의 진영의 영전(影殿) 봉안 기록이 있어 제작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초상화는 숭불 사상의 영향으로 왕 및 왕비의 진영을 비롯해 공신도상, 일반 사대부상들도 각종 사찰에 봉안돼 그 천복을 기구해 왔다. 이러한 점은 조선 초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른 분야에 비해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탁월한 분야로 손꼽힌다. 현재 수차례의 전란으로 많은 수의 초상화가 산일됐으나 각지의 서원·사우 및 영당에는 후손 및 유림에 의해 선조 및 명현에 대한 추숭의 염(念)으로서 봉안, 향사돼 오고 있다.
안동의 초상화들을 살펴보고 역사적 의의를 알아본다. <편집자 주>

■ 조선의 초상화
초상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시되는 시기는 조선시대로, 국초부터 유교를 실천적 지도 이념으로 표방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의 어진제작과 공신상, 유교서원에 봉안된 각종 초상화가 많이 그려지면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다. 보본사상(報本思想)에 근거를 둔 가묘(家廟) 및 영당(影堂)의 설립을 국책적으로 권장했다.
조선의 초상화는 사형(寫形)뿐만 아니라 마음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신(傳神), 즉 인물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얼굴 표현에 전념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기 이후부터는 각종 서원(書院) 및 일반 사우(祠宇)가 속속 건립됐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그러한 장소에 봉안될 초상화의 수요를 자극해 활발한 초상화의 제작이 이뤄졌다. 이를 담당하는 초상화사(肖像畫師)들의 기량 또한 높아갔고 이를 보는 관상자(觀賞者)의 감상안(鑑賞眼) 또한 고양됐다.

◇ 목은이색선생영정 (牧隱李穡先生影幀)
▲ 목은 이색 (1328∼1396)
삼은(三隱) 중 한 사람으로,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했다. 고려 말인 공민왕 16년(1367) 성균관대사성이 됐다.
공민왕 1년(1352) 세금제도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장려, 불교억제 등 여러 정책에 대해 건의문을 올렸다.
학문과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정치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목은 문하에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등 많은 학자를 길러내어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뤘던 만큼 전국의 곳곳에서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 영정 특징
안동의 목은이색선생영정은 세로 170㎝, 가로 94㎝로 1983년 6월 20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됐다. 이색 초상의 유래에 관해 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전하는데 허목 당시에는 원본인 정장관복본이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되찾아 왔으나 훼손이 심해 이모(移模)하는 등 여러 곡절을 거쳐, 현재 남아있는 목은 영정은 모두 이모에 이모를 거듭해 내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대학자였던 권근의 찬하는 글이 있고, ‘영락갑신9월’이라는 기록이 함께 있어, 조선 태종 4년(1404)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 역사적 의의
조선후기 작품으로 양촌 권근의 찬문이 화면 밖 좌우에 적혀있다. 국립중앙박물관본의 경우는 화복 내 상단좌우 가장자리에, 예산 누산영당본은 화폭 오른쪽 상단부에 9줄로 나란히 쓰여 있다. 이모를 통해 전해지기는 했지만 권근의 찬문이 쓰여진 애초의 원본이었던 영락 갑신년(永樂 甲申年, 1404년)의 도상형식은 유지하고 있다. 목은이 은거한 뒤 야복 차림의 본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초상화는 고려 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했으며,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다.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이현보초상(李賢輔肖像)
▲농암 이현보 (1467∼1555)
연산군 4년(1498) 문과에 급제한 뒤 내직으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과 외직으로 밀양과 안동, 충주 등지의 지방관을 지냈다. 이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42년 76세 때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소재로 삼아 시조를 지은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많은 저서 중 ‘어부가’ 등 시조가 유명하다.

▲ 초상 특징
1986년 10월 15일 보물 제872호로 지정됐다. 가로 105㎝, 세로 126㎝로 비단에 채색했다. 이현보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1536년(중종 31), 무관복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위가 뾰족한 평량자(平凉子: 패랭이)를 쓰고 담홍색 무관복을 입었다. 허리에는 물소뼈로 만든 각대를 두르고 있으며 오른쪽을 바라보며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손이 나타나지 않는데 오른손에 지휘봉인 불자(拂子)를, 다른 한 손은 책상을 잡고 있다. 앞의 서안 위에는 펼쳐진 책과 벼룻집이 놓여 있다. 책상 아래로는 검은 가죽신이 보인다. 얼굴은 기운이 생동하지만 의습(衣習)과 손발의 묘사는 평범하다. 차양이 큰 평량자를 비뚜름하게 쓴 채 눈을 크게 뜨고 앉아 있는 모습, 자세와 서안(書案)의 각도가 맞지 않는 점 등은 자연스럽다. 1536년 동화사의 승려이자 화가인 옥준상인(玉峻上人)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순조 27년(1827)에 훼손을 우려한 후손들에 의해 이 그림의 모사본이 만들어졌다.

▲ 역사적 의의
특이한 상용 형식에도 얼굴과 옷 주름을 단조로운 선으로 표현하는 옛 기법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조선시대의 입제(笠制)가 성종대에는 위가 둥글고 테가 넓었던 것이 연산군대에 와서 위가 뾰족해진 형태를 취하게 됐다는 입제의 변천에 잘 부합된다. 복제면에서도 흉배를 착용한 공복이 아니라 담홍포(淡紅袍)에 서대(犀帶)를 하고 있다. 필선은 태세(太細)가 별로 없는 단조로운 선이다. 전신(傳神)의 묘를 찾아보기에는 균형이 잡히지 않은 부분이 많아 다분히 만화적(漫畫的)인 의취가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이현보의 곧은 기개와 활달한 성품이 잘 묘사됐다. 현재 몇 점 남지 않은 16세기의 초상화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 김진 초상 (金璡 肖像) 1995.07.19.
▲ 청계 김진(1500∼1580)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우하다가 귀향해 자녀 교육에 전념했다. 자식들이 모두 대과 및 소과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 일컬었다 한다. 김진은 조정인(朝廷人)들로부터 숭앙받은 인물이 아니라 가내(家內)의 출중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동인(東人)의 기수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아버지로서 더욱 유명하다.

▲ 초상 특징
1995년 7월 19일에 보물 제1221호로 지정됐다. 1572년(선조 5)에 그려졌으며 크기는 가로 109㎝, 세로 142㎝이다. 화폭의 윗부분은 3폭을, 아랫부분은 4폭을 연폭으로 결봉해 모두 7폭으로 돼 있다.
모시 바탕에 채색해 그렸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으며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머리에는 높고 테가 넓은 전립을 썼으며 빛바랜 녹색의 옷을 입고 있다. 길고 가는 입영(笠纓: 갓끈)을 부착하고 있어서 김진 생존 시의 모제(帽制)와 상합된다. 얼굴은 몇 개의 선으로만 처리했고 눈매는 매우 가늘다. 코를 중심으로 약간의 담홍색 선염(渲染)을 집어넣어 안면의 오목한 부위를 나타냈다. 묵선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갈색선, 붉은 선 등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명상에 잠긴 듯한 얼굴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 역사적 의의
김진초상은 김시습(金時習)초상, 이현보(李賢輔)초상 등과 같은 계열의 조선 중기 평량자형 입제(笠制)의 야복본(野服本) 초상화 계열로서 관복을 갖추어 입은 정형화된 형식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선생의 성격이나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생시(生時) 진상(眞像)으로서 그 당시에는 선유암이란 암자의 스님에게 보관을 맡겼다. 10대손 김상수(金常壽)의 ‘지려유고(芝廬遺稿)’를 보면 김진이 73세되는 1572년 이 초상을 그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후손인 김시정(金始亭)에 이르러 이 초상화를 사빈서원(泗濱書院)으로 이안하던 중 영정이 훼손되자 새로 부본(副本)을 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빈서원기(泗濱書院記)’에도 수록돼 있다. 현재 종중에서는 원본 및 부본을 함께 받들고 있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안동 의성김씨 종택에 보관돼 있었으나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돼 있다. 이현보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안동지역의 사대부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