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편집국장

  
지난주에는 평소에 늘 만나는 선배와 포항 동빈 대교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별미인 고등어 추어탕을 점심으로 먹고 경주 안압지(雁鴨池)에 봄바람을 쐬러 갔다. 삼십여 분 달려서 도착한 안압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임해전과 월지(月池) 주변에 많은 상춘객들이 붐볐다.
 
통일신라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안압지는 왕이 귀빈을 접대하거나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었다. 신라가 패망하고 조선 시대 때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이곳의 정식 명칭은 신라 동궁과 월지로 사적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서 궁내를 한 바퀴 돌면서 선배는 봄꽃 사진을 찍고, 나는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신라인의 체취를 더듬으며 화려했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안압지 주변 곳곳에 심어진 벚나무에는 꽃이 아직 피지 않았고 모과나무는 가지 사이마다 파릇파릇한 연한 새순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초록의 잎을 달지 않고 곧바로 꽃이 되는 벚나무와 초록의 잎을 오랫동안 달다가 나중에 힘들게 꽃을 피우는 배꽃처럼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지(月池)에는 자라들이 바위에 올라 한가하게 봄볕을 쬐고, 잉어들은 물위로 솟았다가 다시 곤두박질치며 오후의 햇살에 은비늘을 자랑하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외국인과 대학생들이 유적답사를 많이 와서 조금은 북적거리고,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런 모습이 왠지 좋아보였다. 담 한쪽 구석에는 수선화 몇 송이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곱게 피어 있었고, 선배는 수선화의 청초함을 여러 각도에서 앵글에 담았다. 수선화 곁에 활짝 핀 매화에는 벌들이 붕붕거리며 떼를 지어 날아들었다.
 
안압지 군데군데 심어진 대숲에 들어가 댓잎에 이는 바람소리도 듣고, 벤치에 앉아 못(池) 한 가운데서 춘풍에 흔들리는 수양버들과 소나무, 한가롭게 떠있는 청둥오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안압지를 빠져나왔다. 선배의 차를 타고 오는데 맛있게 먹은 점심 탓인지 춘곤증 때문인지 몸이 나른한 게 몹시 졸렸다.
 
자동차가 생긴 후 포항과 경주간의 인위적 거리는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지만, 꽃이 피고 지는 자연적 거리는 차이가 많이 있는 것 같다. 포항의 벚꽃은 경주보다 늘 열흘 이상 빨리 피는데 비해 경주는 비슷한 시기에 겨우 꽃망울이 맺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포항에 도착하자 선배와 곧장 헤어져서 천천히 걸었다. 느릿느릿 이동(梨洞)으로 오는데 주택가 담장의 개나리들은 살랑대는 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고 있었다. 방장산 터널 고가교 108계단을 천천히 오르면서 고가교 아래에 있는 옥천사 경내에 심어진 향나무와 군데군데 소담스럽게 핀 봄꽃들을 내려다보며, 푸른 하늘에 천천히 떠가는 몇 점의 구름도 고개 들어 바라보았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겠지만 고가교 계단의 숫자가 복잡한 삶의 백팔번뇌도 함께 생각해 보라는 것 같아서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삶에 대한 번뇌를  생각하며 걸었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어디서 부는 바람이 내 마음을 좇아 이곳까지 왔을까? 눈부신 햇살, 만물이 소생하는 약동의 계절. 이 찬란한 봄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언덕을 오르면서 아파트 담장에 피어있는 순백한 목련과  처절하게 바닥으로 투신하는 붉은 동백, 천공을 떠 받치며 담 사이를 뚫고 조금씩 올라오는 민들레를 보면서 지나간 봄들을 떠올려 본다.
 
내 인생에서 봄날같이 아름답고, 흥분되었던 날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빈손으로 와서 한 번 뿐인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 언젠가는 육신마자 훌훌 벗어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자잘한 삶에 연연한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소진시키고 가야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다.
 
문득 주어진 한 생각에 매순간을 감사하며 즐겁게 미련 없이 삶을 즐겨야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살다보면 개 같은 일도 생길 것이지만, 한 번 뿐인 인생이니까 행복해야 한다. 느릿느릿한 일상 어딘가에 행복은 숨어있다. 그 행복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50만 인구가 조금 넘는 이 조그만 항구도시 어디에선가 숨어있을 사소한 일상에서의 행복 찾기는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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