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은 지난 2일 지역 학생과 주민 3,000여 명이 모여 100년 전 1919년 4월 2일(성주장날)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고 기념 문화제를 가졌다.

성주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성주읍 성주장터, 선남면, 가천면, 벽진면, 수륜면, 대가면, 월항면 등 7곳에서 8회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당시 참여인원은 총 3,300여 명이며, 그 중 체포당한 인사는 133명, 투옥된 인사 52명이다. 일본 경찰의 총격으로 부상당한 인사는 20여 명, 사망 3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주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주도한 파리장서운동의 중심지였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국의 유림 137명 가운데 성주가 가장 많은 15명이 서명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치열했던 성주의 독립운동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성주 주민들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성주의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치게 됐다.

성주 주민들은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지난 1월 25일 “성주 파리장서 4.2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했으며, 3월 1일 성주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백세각에서 격문(통고국내문) 인쇄하기, 태극기 그리기 행사와 3월 10일 대형 태극기에 손바닥 찍기 행사, 그리고 3월 15일 학술대회를 진행해 왔다.

드디어 지난 2일(성주장날) 오후 5시부터 지역의 유림들과 학생들, 그리고 주민3,000여 명은 각 읍면 단위로 이천강변에 집결한 후, 풍물패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성주장터로 향했다. 성주장터에서는 일본 순사들의 만세운동을 탄압하고자하는 상황극이 곳곳에서 벌어지며, 플래시몹과 100주년을 기념하는 “100북” 공연이 이어지고 성주청년유도회 회장의 격문(통고국내문) 낭독이 이어지고 바로 성주군청 광장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행진은 100명의 풍물패가 북을 치며 앞장서고, 뒤를 이어 대형태극기를 앞세운 130명의 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추진위원, 도포를 입은 100명의 성주지역 유림, 만장과 횃불을 든 학생 200여 명이 행진한다. 만장은 성주 학생들이 독립운동가 85명의 이름을 문자도로 새긴 것이다. 이어 읍면별 풍물패 250명을 앞장세운 읍면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 행진, 앞장을 선 총 700여 명의 주민과 학생들이 두루마기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만세를 부르며 뒤따랐다.

성주군청 광장에 도착 후, 이어진 100주년 기념 문화제는 성주 주민과 학생 669명이 출연하고, 스텝 포함 총 1,000여 명이 준비한 대규모 행사이다. 애국지사의 이름이 새겨진 만장이 입장을 하고, 주민과 학생들의 손바닥을 찍은 대형태극기가 성주군청 건물에 전개되면서 문화제는 시작됐다. “풍물마실”의 대북 비나리 공연과 동시에 횃불이 점화되며, 개막식에 이어 “별고을 광대”의 만세운동 재현 상황극, “별고을 시낭송회”의 독립청원서(파리장서) 낭독, “별동네공동체”의 플래시 몹, 서예가 박기열의 서예퍼포먼스가 이어졌다.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의 안전과 사고 예방을 위하여, 성주경찰서에서는 관리요원 배치, 해병전우회와 모범운전자회에서 교통 통제 및 안전관리를 지원했다. 성주소방서는 화재예방 조치 및 구급차량 지원, 성주보건소는 구급차량 지원 및 비상 의약품을 제공했다.

성주 파리장서 4.2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는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가장 큰, 대규모의 행사이며 성주 주민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민간주도의 행사로 준비해왔다는 것이 여타 지역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와 차별화 된다.

특히 성주 학생들이 85명의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문자도로 그린 만장, 주민과 학생들의 손바닥을 찍은 대형 태극기, 성주지역 풍물패 350명이 참여한 대규모 공연, 도포를 입은 100명의 유림 참여, 80여 명의 합창단, 60여 명의 플래시 몹 등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뜻 깊은 행사가 치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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