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봄볕 때문이다. 어지러운 내면을 붙잡고 우는 대신 밖을 택해 걷기로 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꽃이다. 어디에 눈길을 주어도 눈맛이 시원하다. 맵찬 바람 속에 웅크려 있다가 심호흡하며 기지개켜는 여린 생명들의 꿈틀거림으로 술렁인다. 바람은 연두빛 색을 전하고 흙 내음 풀향기가 겨우내 외틀어진 내 안부를 묻는다. 천지간에 펼쳐지는 연두의 행렬이 경이롭다. 미세먼지가 걷히고 꽃 진자리에 푸름의 청 빛이 맑다.

외로운 은둔자보다 고독한 산책자를 택해 나온 걸음이 가볍다. 가랑비가 내린 뒤의 연노랑 봄볕에 영혼마저 풀물 들어 온갖 두려움은 사라지고 사색에 잠긴다. 창문이 열리고, 대문을 열어 한껏 봄볕을 받아들이는 동네풍경에 마음의 독성이 중화되고 영혼마저 맑아진다.

지붕 낮은 주택들이 오종종 모여있는 외진 골목 미니슈퍼 앞. 못 보던 노란 평상 하나가 나와 앉아 해바라기 중이다. 지난 달, 희고 커다란 목련꽃이 떨어져 추적추적해 보이던 자리다. 가만히 보니 덮어씌웠던 비닐을 걷어내고 페인트로 새단장한 작년의 그 평상이다. 아니다. 업그레이드 됐다. 부실해 보이던 다리는 굵은 나무 받침대로 괴고, 떨어져 너덜거리던 모서리의 아찔한 조각들도 이어내 튼실하게 붙여놨다. 사람 다섯만 앉아도 돌아앉기 힘들었던 평상이 마치 겨울잠 한 번 진하게 자고 일어나 변신에 성공한 모습이다.

봄볕에 나른한 전신을 드러내놓고 오수를 즐기는 듯한 노란 평상. 마치 겨우내 자란 털갈이 하고 마실나온 이웃집 강아지 만난 듯 반갑다. 밝고 산뜻한 노란색에 이끌려 냉큼 걸터 앉는다. 남아 있는 페인트 냄새가 반긴다. 때마침 평상을 살피려 나온 슈퍼집 아저씨는 족히 일곱, 여덟까지 앉을 수 있다며 봄볕같은 미소를 짓는다. 이제 곧 겨우내 부실해진 다리에 힘 올리려 동네 시니어님들이 앞다투어 나오고, 텃밭의 풋것들이 우우 돋아나면 군둥내에 절은 이들이 저 평상에서 삼겹살에 막걸리 앞에 놓고 입맛 다실 것이다.

요양원에서 한 겨울을 지낸 감포댁도 돌아왔다. 딱딱 지팡이 소리 요란하게 건재감을 과시하며 골목을 채우듯 나온다. 여름, 겨울한철은 시설좋은 요양원에서 지내다 돌아오기를 반복한 지도 어언 몇 해. 냉난방이 부실한 낡은 집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궁여지책 고안해 낸 대안이었다.

그때마다 구순을 바라보는 감포댁이 최첨단 시설의 요양원을 거부하고 굳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 때문이다. 깊음이 있는 오랜 이웃의 그 편안함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깊음은 물이나 산 같은 데만 있는 건 아니다. 오래 마음 나누고 함께 걸어가는 이들에게도 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않고, 당장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지 않으며, 편해 보인다고 그 길만을 걷지않아 시간과 노력이 제법 든 깊음의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깊음으로 각자의 마음을 보듬고 감정에너지도 교환한다. 그 곳이 바로 동네 슈퍼앞의 작은 평상같은 친근함이 깃든 제3의 공간이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친목을 다지는 사회적 공간을 넘어 사람들을 느슨하게 연결시켜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이 공유하는 이런 공간은 억지로 대화를 붙이거나, 참견하지 않지만 결코 프라이버시를 위해 칸막이를 나눠 사는 공간과는 다르다. 그저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면 잡아주고 위로하며 나눈다.

움직임이 불편해 경로당까지 왕림하기가 힘든 연로한 감포댁이나, 팔순에 까막눈을 벗어나 간판 글씨도 읽고 시도 쓰며 손녀를 돌봐야 하는 은아 할머니나. 몸져 누운 영감님의 간병인이 되어 종일 동동거리는 성주댁 같은 이들이 궁둥이 붙이고 막걸리 한사발 놓고 푸지게 한시름 나누는 곳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학원과 가게를 오가는 딸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은 부동산 아저씨도, 도장가게 할아버지도, 동네 자투리 빈터마다 텃밭을 일구어 푸성귀를 내다 파는 이야기 할머니인 최여사도 고정 멤버다.

이곳은 주로 제발로 멀리 갈수 없거나 시간에 메인 이들이 짬짬이 서로 공간을 공유하며 머무르는 곳이다. 그리고 무언의 약속이라도 하듯,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마음을 돌볼 수 있다고 믿는 곳이다. 그들에겐 그들만이 감내한 세월의 힘이란 것이 있다. 마음에서 걸러낸 그들만의 안목이 있고, 타인의 슬픔이나 기쁨을 보는 남다른 눈도 있다. 때로는 세월이 품은 그들의 그런 것들이 다른 이들의 삶에 이정표가 되기도, 감동을 주기도 한다. 오가는 이들이 그들의 장기판을 기웃거리거나 막걸리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작은 가르침을 받는 곳도 이런 곳이다.

부러지고 상처난 고구마, 찬 밥덩이, 엿질금이 섞여 제 성질을 내려놓고 함께 삭혀짐으로서 엿물이 되듯. 서로 다른 재료들이 제 성질 고집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 받아들이고 조금은 비워두는 너그러움까지 생겨나는 것은 세월이 사람에게 주는 값진 의미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수 있다면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다. 세상 사는 게 갈수록 힘들다 보니 현실을 외면하고 눈을 감고 싶을 때. 특별할 것도 없는 이곳이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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