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경진(한국U&L연구소, 전 중등교장)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지성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이다. 동시에 언제나 무엇이 보다 가치 있는 일인가를 늘 사색하는 습관도 가져야 한다. 특히 남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다독(多讀)과 사색(思索)의 두 가지 덕목이 요구된다. 사색 없는 다독은 비판력을 저하시키고, 다독 없는 사색은 독선적으로 흐를 우려가 많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절대 시간은 많은 편이지만, 참고서, 수험서, 잡지, 만화 이외의 교양서적에 대한 독서량을 매우 빈곤하다. 2016년 통계청 자료 ‘한국인의 독서 습관’을 보면, 전 국민의 평일 하루 평균 독서 시간은 6분이며, 하루 10분 이상 책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10%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정보의 홍수 시대에는 일반인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쓰여 진 다양한 책들은 통독하기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책,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보는 습관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필요한 부분을 정독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다독 없는 사색형(型)이다. 사색형 인간의 공통점은 편향성과 독단성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자성적 사색이 필요하므로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늘 제자리에서 맴도는 경향이 있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데 한계점을 보이게 된다.

특히 다독형이 아닌 사색형 인간이 공공 조직의 지도자가 된다면 성공적인 리더십을 구현하기 어렵다. 소통 장애 현상 때문이다. 이런 경우 지도자의 의견이 구성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지향점이 늘 한 가지 방향이어야 한다. 공공선(public good) 또는 일반의지(general will)를 찾는 일이이며, 편향 확증의 오류에 대하여 늘 반성적 사고를 하는 일이다. 오로지 인사권자의 기호에 맞추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저명한 학자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는 의외로 읽지 않은 필독서가 많다고 한다. ‘세계 명사들의 읽지 않는 필독서’란 주제로 미국의 한 언론 매체의 조사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삼국지(三國志)’를 읽지 않은 중국사 전공자, ‘미국 독립선언서’를 면밀히 살펴보지 않은 미국사 전공자가 있는가 하면, C. Becker의 ‘Modern Democracy’를 읽지 않은 민주주의론자가 있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헌법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국회의원이 있다. 행정학의 기본 원리를 공부하지 않은 행정 각부 장관이 있으며, 특히 중앙 집권과 지방 분권의 장단점을 분석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지방자치를 주장하는 지방 의원이 많다.

현실의 정치사회에는 ‘다독과 사색이 겸비되어야만 철학적으로 남을 지도할 수 있다’는 원리에 어긋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문가에 의한 합리적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마추어가 전체 사회를 지배하는 일종의 ‘바보 정치 현상(mobocracy)’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컨대, 집권과 분권의 이론을 살펴보지 않고 지방 분권과 지방 자치는 무조건 선(善)이고 중앙 집권과 전국화 광역화는 무비판적 악(惡)인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궤변이 되는 것이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 역할을 하는 자들에 귀 기울여야 하고 다원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그 기능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기초 의회의 의원과 단체장, 광역시·시·도 의회 의원과 단체장 선거가 실시되면서 본격적인 지방 자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방 자치제는 서구에서는 ‘풀뿌리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초등학교’라 불리며, ‘치자(治者) 피치자(被治者) 동일성(同一性)의 원칙’이라는 민주 정치의 기능을 기대하고 출발하였지만 아직 그러한 순기능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방 자치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읍, 면, 동의 대표인 기초 지방 자치 단체의 장(長)과 기초 의원(議員) 까지 특정 정당 가입을 종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지역 주민으로부터 추대되고 입후보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정당의 공천을 받도록 하고 있는 점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위협하게 된다. 우리나라 중앙 정당은 언제나 정쟁 대립이 심하므로 중앙당 공천 제도와 사실상의 정당 가입 요구는 첨부터 풀뿌리가 아니라 해바라기를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주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질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 정치 현상과 연계되어 중앙당의 지침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빈 깡통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속이 가득 찬 깡통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 나는 깡통은 속에 무엇이 조금 들어 있는 깡통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말하지 않는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잘 알기 때문에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무엇을 조금 아는 사람은 언제나 소리 나고 시끄럽다.

현 정부에서 야당의 반대에도 대통령이 강행 임명된 자들을 보면 한결같이 무언가 조금 들어 있어서 ‘소리 나는 깡통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온통 세금으로 복지를 증진시킨다고 말하므로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있고, 기업인들의 자존심을 훼손시켜 시장 경제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젊은이들에게 고용 참사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편향(偏向) 확증(確證)으로 종합적 시각에서 바라볼 줄 모른다.

공공 정책 결정의 지도자들은 다독 없는 사색으로 편향된 시각을 고집하거나, 사색 없는 다독으로 시류(時流)에 편승해버린다면 한국호(號)는 희망의 방향으로 나갈 수 없다. 공공선과 일반 의사를 찾을 수 있는 균형된 관점을 가져야 하며, 조직의 기본 목표를 강조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활동에 이론적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여 자긍심을 갖게 하여야 하지만 그런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나라가 참으로 걱정이다. 모든 정치 사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읽지 않은 필독서 목록을 작성해 보아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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