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의 아픔 후 굳건해진 해봉사

구룡포읍에서 출발해 포항해맞이광장으로 향하는 호미로를 따라가다 강사 1리 교차로 터널 밑에서 좌회전을 해 강사 3리 저수지를 오른쪽 옆에 두고 차를 달린다. 조금 후 절골 마을을 지나니 해봉사가 보였다.

△소실의 아픔 후 굳건해진 해봉사 전경

해봉사는 636년(신라 선덕여왕 5년)에 왕명으로 창건당시에는 군마를 기르는 곳으로 명월암이라 불렸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세운 법화종의 계통을 잇는 대한불교 법화종의 전통 사찰로 내려왔으나 퇴락의 길을 걷다 조선 명종 대에 상선 대사가 당우 13동에 4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할 만큼 크게 다시 세웠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해봉사는 암자 형태로 명맥을 이어오다 1973년 화재로 소실된 후 현대에 다시 중창됐다.

법화종은 성불을 지향하고 중생을 교화해 널리 불법을 펴서 호국함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신라의 원효, 고려의 제관 스님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1985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해 1992년 대웅전을 지었다. 새로 지어진 사찰은 오래되지 않은 대웅전과 범종각에서 나오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된 절의 고색창연한 단청의 색이 주는 고즈넉함 대신 짙은 단청 색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활기찬 기운이 절 마당에 가득했다. 대웅전 각 문마다 빗살문 문살 위에 연꽃 한 송이를 꽃과 줄기와 잎까지 크게 돋을새김을 하고 아랫부분에도 붉은 연꽃 한 송이를 그려 넣어 불교의 상징인 연꽃의 모습이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향기와 깨끗한 꽃을 피워 불교의 근본 교리인 온갖 더러움과 죄악에 물든 세상에 있지만 물들지 않는 청정한 도와 열반 뒤에 이르는 극락세계를 상징한다.

또한,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맺는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나타나는 연꽃처럼 선한 일을 하면 선한 결과가 나오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결과가 나온다는 불교의 인과법을 가르치는 꽃이다.

△삼라만상을 구제하는 소리, 범종

범종루에는 네 개의 법구가 천장에 매달려있는데 불교의식을 행하거나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한다.

부처의 음성을 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에게 전해 도를 전하고 구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범종은 절에서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불교의식이 있을 때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구제해 괴로움을 없애고 평안함을 누리도록 사용했다.

짐승들을 위해서 두드리는 큰북인 법고, 물고기를 위해 두드리는 목어,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을 위해서 울리는 운판이 있어서 삼라만상을 구제하는 사찰의 의미를 더하고 있었다.

△상처받은 유가족을 위로하는 국민보도연맹희생인위령비

해봉사를 둘러보던 중 포항지역 국민보도연맹희생인위령비가 서있었다.

그 기단에는 포항보도연맹희생인위령제단이라고 적혀있다. 비문에는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들이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밝힌 나라의 위법을 2015년 대법원에서 확정받고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세우고 제단을 마련했다고 적혀있다.

보도연맹사건은 해방 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1949년 6월 구성한 관변 단체였으나 조직원을 늘리라는 관의 압박으로 공무원과 경찰들이 평범한 민간인들도 무작위로 가입시켜 30만명에 이르렀고, 1950년 6.25가 일어나자 재판도 없이 전국 각 지역에서 20만명을 구금 후 대량 학살한 우리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은 불행한 사건이다.

그 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가족과 친척들도 요시찰 인물로 분류해 취업에 각종 불이익을 주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연좌제를 실시했다. 유족들은 경제적 곤궁,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가지고 어렵게 살아가야만 했다.

이념으로 인한 전쟁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사라져간 사람들과 남은 가족들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힘을 쏟는 일이 나라와 종교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1950년대의 역사적 과오와 이념이 명쾌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힘없는 국민을 나라가 재판 없이 무차별 학살한 사실은 밝혀졌으니 남은 유가족들과 상처받은 국민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는 해봉사의 또 다른 역사가 되지 아닐까한다.

수많은 유골이 발견되고 죽음의 현장이 밝혀지고 정부의 지시로 경찰과 군인에 의한 우리 국민의 학살이라는 사건이 밝혀지게 됐지만, 더 자세한 내막이 밝혀져서 남은 유족들의 깊은 상처에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위령비 앞에서 묵례를 올리고 돌아서 나왔다.

전시대의 엄혹했던 현실을 불교의 화엄의 교리로 안고 서있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비석이었다.

△백일동안 지지 않는 목백일홍

대웅전을 가로질러 요사채 쪽으로 나오니 절 마당 귀퉁이에 수령이 250~350년이 됐다는 백일홍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백일홍은 한해살이 꽃과 나무 형상의 목백일홍이 있다. 목백일홍은 꽃이 백일 동안 지지 않는다고 해 백일홍에 나무 목자를 붙인 이름이다.

거의 모든 꽃이 열흘을 넘기지 못하니 목백일홍이 선비의 집이나 사찰에 많은 이유는 자라면서 껍질이 계속 벗겨지는 나무처럼 서원이나 사찰에서 오래 마음이 변하지 말고 공부와 수행에 정진하고, 처음 마음을 끝까지 가져가는 지조 높은 뜻을 가지라는 뜻으로 심지 않았을까하고 유추해본다.

전국의 오래된 사찰이나 서원에 목백일홍이 많아서 뜨거운 여름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붉은 꽃을 끊임없이 피우니 몸과 마음의 수행에 평생을 정진하셨던 선조들의 정신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주는 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해봉사의 목백일홍은 크기가 작은 집채만 해 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한다. 바위나 물이나 쇠처럼 무생물이 아닌 나무가 2백년, 3백년을 넘어 산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라 사람들은 목백일홍의 아름다운 꽃과 빼어난 자태를 보러 꽃피는 8월이 되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다고 한다.

해봉사의 목백일홍이 뜨거운 햇볕을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잎들이 짙푸른데 분홍 꽃들을 자욱하게 피우고 서있다.

수백 년을 넘은 늙고 비틀린 가지가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어찌 가슴에 품고 있었을까 싶다.

한겨울 앙상한 가지로 찬바람과 눈을 견디고 봄이 오자마자 저마다 다투어 피던 봄꽃들이 자취 없이 사라지고 없을 때, 백일홍 늙은 가지마다 염천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듯이 한 채의 꽃집을 짓고 선 목백일홍은 사람들의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상의 인심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고승과 지조 높은 선비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백일홍 나무 그늘에서 수북이 가지를 벌인 수국의 푸른 꽃도 만발해 방문객을 맞고 있다. 옥잠화는 물결무늬 연록 잎사귀를 펼치고 석축 위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옥비녀 같은 흰 꽃을 피울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해봉사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는 저수지 둑에 있는 잡목을 의지 삼고 자란 칡넝쿨마다 진홍색 꽃 타래가 진한 향기를 머금고 송이송이 매달려있다. 칡 나무의 생존번식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먹이를 찾는 벌과 사람들을 위한 아름다운 보시였다.

세상 만물과 자연의 이치처럼 사람들도 서로를 보듬으며 사계절을 지나고 한 생을 살아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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