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조국사태’를 겪으면서 종종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홍위병’(紅衛兵)이라는 익숙한 단어는 원래 마오쩌둥(毛泽东) 시대의 신중국을 관통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위병은 ‘신중국’의 두 가지 ‘트라우마’ 중 하나로 꼽히는 ‘문화대혁명’을 발동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른 한 손에는 손바닥만한 ‘마오쩌둥 어록’을 든 홍위병 무리들은 전중국에서 톈안먼 광장에 모여들어 ‘마오주석 만세‘를 외쳤고,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마오 주석의 선동구호에 따라 당시 국가주석인 류샤오치(刘少奇)의 중난하이 자택에 쳐들어가서 류 주석을 공격하고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류 주석의 부인 왕광메이는 홍위병들에게 끌려나가 탁구공목걸이를 한 채로 인민재판을 당하고 모욕을 당했다.
극단적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은 닥치는대로 중국공산당의 고위간부와 고위관료, 학자, 지식인 등을 ‘주자파‘, 경직된 관료이자 숨어있는 우파라며 끌어내 비판했다.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중국 최고 대학의 권위있는 교수들도 홍위병들의 타도대상이었다. 홍위병들의 우파잔재청산은 ’‘적폐청산’의 원조였다. 기존의 모든 관습마저도 좌파적 시각에서는 수정주의자, 주자파의 잔재였다. 심지어 “교통신호등의 ‘빨간색’이 정지신호라는 것은 우파들의 사고“라며 ”혁명을 상징하는 적신호는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며 교통호체계마저 바꿨고 자동차의 우측통행은 ‘미제국주의자의 유산’이라는 명분으로 좌측통행으로 바꾸려고 하기까지 했다.
대학생인 아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를 고발했고, 교수인 아버지는 학생들 앞에 끌려 나가 집단린치를 당해 사망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시진핑(习近平) 주석도 홍위병이었다. 시 주석 역시 문혁이 발동하던 1966년 14살 중학생으로 “마오쩌둥 주석의 어록을 읽으며 매일 뜬 눈으로 밥을 지새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문혁기간 시 주석도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산베이(陕北)의 농촌으로 하방(下方)돼 농삿일을 하다가 ‘공농병‘으로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하방된 그곳에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시중쉰 전 부총리를 직접 비판해야 했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
시 주석 뿐 아니라 서열 2위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왕치산, 장더장 등 제5세대 중국지도자 대부분이 문혁을 겪으면서 하방된 경험을 갖고 있다.

홍위병의 극단적 파괴와 집단적 광기행위에 대해 마오 주석도 처음에는 말리지 못했다. 그로 인한 혼란과 피해가 극심해지자 마오는 문혁발동 2년여 만인1968년 8월 베이징에서 홍위병 영수들을 불러 호되게 비판했다. 그리고는 인민해방군을 출동시켜 홍위병들을 진압했다. 홍위병에 대한 용도폐기이자 ‘토사구팽’이었다.

마오는 자신이 세운 다시 신중국의 최고지도자의 지위와 위상을 확보했다.
‘문화’를 개혁하겠다는 거창한 의미의 ‘문화대혁명’은 사실 권력2선으로 물러난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이 자신의 정책노선을 비판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비롯한 실용주의 노선의 후계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한 고도의 대중선동운동을 통한 친위쿠데타에 불과했다.
‘문혁’은 마오쩌둥의 최대 과오이자 인류역사상 최악의 집단적 광기발호이자 문명파괴행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지도부는 1976년 마오사후 문혁시대를 폐기하고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아 실용주의노선을 다시 채택, 개혁개방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에 대해 ‘過三功七‘(과가 30%이지만 공이 70%)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톈안먼광장에 내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내리지 않았다.
21세기 들어 당시 홍위병으로 활약했던 세대들의 회고록들이 발간되기 시작했고 그들은 홍위병시절에 대해 참회하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혁은 중국에서 제대로 진상규명이 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으며, 그 시절을 미화하고 그리워하는 시각도 생겨나고 있다. 신홍위병이 꿈틀대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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