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시사평론가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주고 받는다. 자주 보며 정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다. 건강과 행운을 복이라는 말에 담아 전한다. 설날까지 이 덕담은 회자되며 효력을 발휘한다. 각박한 세상을 훈훈하게 하는 민족 고유의 윤활 청량제다. 복은 재능을 초월하여 좋은 것을 누리는 덤과 같은 것이다. 재능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굳이 복이라 하지 않는다. 서양에도 ‘행운을 빈다’든지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는 인사를 많이 나눈다. ‘나약한 동물’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미미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장식하는 천재와 영웅들이 모두 복을 받아 누린 것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복이 많아서 최고의 걸작들을 남겼고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이 운이 좋아서 세계를 지배하였던가. 설령 행운과 복이 따랐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근면과 성실성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노력한 열정이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복이나 운으로 포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일만 번의 실패를 거쳐 백열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나 발가락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끝없이 연습한 발레리나 강수진, 태어나서 골프 이외엔 해 본 게 없는 타이거 우즈, 눈만 뜨면 트랙을 달리던 우사인 볼트가 복이 많아서 최고가 되었다면 우리는 주저앉아 복 타령만 하면 된다.

‘미성숙한 인간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랄 때, 성숙한 인간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 제롬 D. 샐린저 ‘호밀 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말이다. 잘 할 수 있는 일을 ‘죽기를 각오하고’ 해 봐야 한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주어진 일을 남 보다 빨리 잘 하든지, 남의 얘기를 들어 위안을 주는 일, 노래를 잘 하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 물건을 잘 만들고, 자전거를 잘 타거나, 명상을 하고 깨달음을 나누거나, 말을 알아듣기 쉽게 잘 하든지. 뭐라도 목숨을 걸고 즐겨 한다면 의미와 열매가 돌아온다.

언제부터인지 불평등이란 말이 주변에서 많이 들린다. 과정은 비슷한데 결과가 이상하다는 얘기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일한 것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남의 것이 더 크고 실해 보이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같은 시기에 같은 선생님께 배웠다고 해서 다 아이비리그나 스카이에 입학할 수는 없다. 타고난 지능이 다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입사 동기 모두가 임원이 되고 회장이 될 수 없다. 능력에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좋은 성과 낼 기회를 모두가 얻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원통형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원시 부족사회에서도 우두머리가 있고 사냥 지휘자가 있고 마법사가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꼭지점이 날카롭게 좁아지는 원추형 사회다.

사람의 불행 밑바닥에는 자기애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있어야 할 것들 지켜야 할 것들이 제대로 되든 말든 나 하나만 잘 살겠다는 자기 사랑은 흔히 그 주인을 파멸로 이끌고 만다. 자기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신뢰해야 할 대상이다. 스스로의 운명과 재능 그리고 세상 모두가 외면하더라도 끝까지 신뢰하고 붙들어야 하는 자기 자신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최악은 아니다. 최악이 아니면 차선인 것이다. 이를 극복하여 최선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주고 받고 있는 ‘복’의 본 모습이 아닐까.

자기애는 때로 자기 혐오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스스로 비하하거나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 자존감도 턱없이 낮아진다. 내가 누군데 세상이 나를 업신여기고 몰라 주느냐고 어리광을 부린다.

남의 것이 크고 실하게 보이는 것도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연봉이나 소득, 아파트 평수, 승용차 크기, 날씬 훤칠한 외모, 울퉁불퉁한 식스팩 등으로 남과 비교해서 쪼그라들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남들이 가진 부가 있었으면 좋겠고, 지위, 학벌, 외모, 건강이 부러운 것 아닌가. 그런 것들을 얻고자 그간 쌓아 올린 내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도 괜찮은가. 억만 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그들은 갖지 못한다. 그들이 가진 ‘그까짓 사소한 것들’ 때문에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건전한 가치관과 사상이 허물어지는 일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린 공포를 감싸주던 엄마 품, 꺼칠한 아버지 수염이 풋잠 볼에 닿던 기억, 어느 날 다가온 첫사랑을 알아보던 황홀함,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서 혹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읽고 원래 나를 발견한 벅찬 감동들을 약간의 편리함으로 맞바꾸는 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가진 것들은 당연히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의 것을 슬쩍 덧붙이겠다는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한다. 새 해에 이 착각에서 벗어나는 일을 먼저 해 보는 것은 어떨지. 나의 삶을 사는가시피 살다간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외치는 그의 묘비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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