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선 시인

경주시 천북면 물천리엔
나 대신 시를 쓰는 나무가 있다
나 대신 시를 쓰는 풀꽃이 있다
오동나무 꼭대기에 사는 까치 떼들이
그 시를 읽느라 하루 종일 깍깍거린다
이슬이 마르기 전에 받아 적어야 할 시가
산처럼 쌓여 있다
내가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은
창밖의 저 나무들 때문이다
내 마음을 다 빼앗아 가버린 저 들길 때문이다
초록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내 마음이 어디를 쏘다니다 돌아오는지 적고 있다
한 줄 두 줄
풀잎이 써 놓은 시를 받아 적고 있다
운동장 모퉁이에서 아는 체를 하던 애기똥풀꽃이며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던 씀바귀꽃이며
개구리들이 일기 예보를 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뻐꾸기들이 남의 둥지에 낳아 놓은
제 새끼를 불러 모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받아쓰기 숙제를 하는 아이들처럼
나는
그 모든 소리를 받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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