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렬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정신과 전문의

혹시 당신도 이 꽃을 보고 계신가요? 불과 며칠 전까지도 변덕스러운 날씨에 올봄은 정말 봄 같지 않은 봄이구나 싶었는데, 오늘은 창문 밖 눈 가는 곳마다 활짝활짝 핀 꽃들이 이제는 확실히 봄이라고 외치는 듯합니다. 꽃들이 참 예쁘네요.

오늘은 유독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좋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인데, 코로난지 뭔지 하는 고약한 놈이 하나 끼어들어 술 한 잔 밥 한 끼 같이 하기도 어렵게 하니 그 좋은 인연이 오히려 아릿한 아픔이 된 듯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참아야겠지요. 우선 이 고약한 놈을 쫓아내는 것이 먼저이니 이놈이 우리 동네에서 더 분탕질 칠 빌미를 주어선 안 되겠지요. 그러니 예쁜 꽃도 그리운 사람도 이렇게 창문 너머로만 바라보며 꾹꾹 참아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이렇게 하고픈 것 보고픈 것 잠시 미루고 인내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빨리빨리’와 ‘지금 당장’을 입에 달고 살아온 역동적 삶은 잠시 멈춘 듯해도 그 삶에 가려져 지나쳐 왔던 다른 시간과 공간은 오히려 풍성해진 느낌도 있으니까요. 음식도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익혀 호호 불며 먹어야 하는 음식, 심지어 아직 피와 살이 살아있는 걸 입으로 가져가야 하는 음식도 있지만, 몇 달 몇 년을 묵히고 삭혀야 비로소 제맛을 볼 수 있는 음식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즉석 불고기 없으면 못사는 사람처럼 역동적 삶이 잠시 멈춘 것을 우리 일상 전체가 멈춘 것처럼 심지어 우리 삶 자체가 멈춘 것처럼 그렇게 놀라고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싶네요.

그래서 말인데, 지금 당신도 봄꽃을 보고 계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우리가 얼굴로 마주 보고 피부로 맞닿아 만날 수 없는 것은 참 아쉽지만, 적어도 우리가 같은 꽃을 대하며 같은 기쁨을 누린다면,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같은 소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연대감은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좀 답답하긴 하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고 싶은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고자 함이니 보지 않고 만지지 않아도 멀어지지 않는 인연, 코로나가 아무리 훼방을 놓아도 여전히 단단히 묶여 있을 우리들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적잖이 위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오늘은 같이 꽃을 보십시다.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라도 삐쭉 내밀어 곱게 핀 꽃들을 찾아보십시다. 그리하면 비록 당신 창문 앞에 심긴 꽃과 내 창문 앞에 핀 꽃이 서로 생김이 다르고 그 종(種)이 달라도 우리는 같은 봄날 같은 나라의 꽃을 함께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여유가 된다면 봄날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아직은 개구리 울음까지 들릴 철은 아니지만, 잘 들어보면 새 소리 벌레 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가 며칠 전과는 사뭇 달라졌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봄은 눈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귀로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봄의 소리를 가득가득 귀에 채워 근래 몇 달 동안 우리 마음을 어지럽혔던 온갖 잡소리들을 이참에 한 번 싹 씻어내 보십시다.

만물의 영장 인간이 일개 미물 바이러스에 놀라 그동안 되는 대로 내뱉고 함부로 전했던 말들, 가짜 뉴스는 말할 것도 없고 남의 공을 자기 공이라 하고 자기 실수는 남 탓이라 하는 간교한 요설(妖舌), 상대의 운수대통이 배가 아파 차라리 다 같이 망하길 저주하는 독설(毒舌)… 이참에 다 싹싹 씻어내고 봄의 생명이 전하는 좋은 소리로만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 보십시다. 어차피 이 시기가 지나가야 가려질 시비들이고, 언젠가는 다 자명하게 역사에 기록될 일들입니다. 지금은 우리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이 봄, 2020년 우리가 함께 살았던 이 봄에만 집중하고 귀 기울입시다.

결국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언젠가는 다 끝날 것입니다. 이 답답함 속에 웅크렸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시기에 안타깝게 가족을 잃었던 분들까지도 미래 어느 날에는 다 생존자와 승리자로서 지금 이 순간을 회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오늘 우리가 이 어려운 시기에도 여전히 꽃을 사랑하고 봄을 기뻐했으며, 늘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자부심이 될 것입니다. 올봄도 변함없는 봄, 만물이 생동하는 희망의 봄이었던 겁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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