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暎根 주필 한동대 교수

 Philip Jai Sohn(필립 제이손)을 거꾸로 읽으면 ‘서재필’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해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직 의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명망가였다.
그런 사회적 여건을 갖고 있는 그가 왜 조선으로 돌아왔을까? 그것은 그의 일생의 목표였던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 때문이다.
귀국 후 동포들의 계몽을 위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도 창설하는 한편 첫 사업으로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린 그 자리에 많은 뜻있는 애국동포들의 성금으로 ‘독립문’을 건립했다.

이 영은문은 중국이 조선 왕의 취임을 승낙하면 황제의 사신이 승낙서인 조칙을 갖고 오는데, 그 사신이 통과하는 자리에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상징적 건축물을 짓고 조선 왕이 친히 이곳에 나와 사신을 영접했다,
오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영은문이야말로 사대주의의 표상이며 현장이었으니 자주독립을 꿈꾸는 지사들이 민족자존의 의미에서도 당연히 부숴버려야 했고,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1896년 11월)을 건립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史實)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지, 이곳에서 반일(反日)행사를 하는 사회 지도층이나, 정부 관계자들의 작태를 보면서 우리 역사 교육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형식적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왜, 중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그렇게 갈망했던가! 중국이 우리를 괴롭힌 것은 고구려 때부터다. 수없는 침략을 하여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신라의 제의로 라당(羅唐) 연합군을 형성하고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자, 중국(당나라)은 신라까지 흡수하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신라는 이에 맞서 당나라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한반도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야욕은 변함이 없었다. 고려(高麗)에서도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침략을 했고, 그때마다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하면서 강요된 신하의 나라가 되었지만, 그래도 국권은 지켜나갔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이성계는 쿠데타를 통해 조선(朝鮮)을 건국하면서 국호를 중국으로부터 하사받음으로써 사대주의 시대가 본격화 됐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국의 질서 속에 편승되었고, 통치철학으로는 주자성리학이 근본 이데올로기로 변하면서 조선의 문명은 중국에 철저하게 예속됐다.

세종이 한글을 제정한 것도, 주자성리학을 전 백성에게 교육하려 하니 어려운 한문을 무식한 백성들이 따라오지 못함을 알고, 쉬운 글을 통해 성리학을 토착화하겠다는 의지에서 한글을 제정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조에 와서는 중국의 제후국이 되었음을 영광으로 삼고, 정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따라서 성리학이 조선 백성의 근본사상으로 정착되었고, 양반 계층이 국가의 지도 계급으로 부상하고, 정권은 위정척사파가 장악했다.

백성의 신분도 자유민인 양반과 중인, 상민으로 형성됐으며, 부자유민으로 천민인 노예가 극도로 증가해 고려에서는 국민의 1%도 안 되던 것이 조선에서는 전체 국민의 40%이상을 차지,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신이 자신을 팔 수도 있고, 부인이나 딸도 형편이 어려우면 매매하였다니 사람이 아니라 명실 공히 상품이었고 동물이었다. 결과적으로 성리학이 낳은 치욕의 역사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였던가? 세종은 위대한 왕임에는 이론이 없지만, 성리학으로 인해 백성의 신분을 등급화하고, 노비는 인간 이하로. 서자는 아무리 영특해도 벼슬길로 나아갈 수 없게 돼 인재가 사장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제도가 확대되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됐다.
중국은 이로부터 조선을 갖고 놀았다. 우리 스스로가 자청한 것이니까 원망할 것도 없지만, 그들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한 만행의 수준이었다. 조선의 왕을 인정하는 천제의 ‘조칙’을 사신이 갖고 오는데, 왕이 직접 왕림해 접대를 했다. 사신이 중국의 황제 행세를 하여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했다. 사신으로 한번 오면 평생을 먹고 살 뇌물을 챙겨갔을 뿐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수탈해갔다.

조선은 모든 정치를 아예 중국에 의지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 생활양식까지도 그대로 따랐다. 성리학의 본산인 원(元), 명(明)이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의 새로운 정부로 탄생했음에도 명나라만 섬기다가 무지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15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선박의 발달로 대항해시대가 문을 열었고, 이어 벌어진 강대국들의 식민지 쟁탈이 하나의 관례가 됐다. 즉 양육강식의 국제정치가 전개되고 있음에도 조선은 태평천하였다.
우리 머리에는 중국만이 있었는데, 그 중국이 영국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자, 조선도 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자각이 선각자들 사이에서 움트기 시작하면서 ‘자주적 변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의 자주화를 묵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선을 더욱 옥죄고, 군사적으로 도 속국화(屬國化)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중국의 이러한 강경책은, 요동치는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언제 조선이 반중국 세력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中편에서 계속...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