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일 수필가

 지난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다. 이날 우연히 뉴스를 보니 ‘공공분야 쉬운우리말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한글문화연대(대표 이건범)가 ‘쉬운 우리말 사전’을 공개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정부와 지자체, 공공기관과 언론에서 자주 쓰는 외국어 3579개에 대해 쉬운 우리말 대체어와 다양한 용례, 용어에 대한 국민 인식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사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표적인 사례로 든 것이 '게리멘더링'이었다. 게리멘더링을 '자의적 선거구 획정'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 순간적으로 ​이러한 인식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언어의 다양한 역할은 무시하고 단순한 기계적인 의사 전달만 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주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자로 표기하는 단어에는 고유한 역사가 있는데 억지로 이를 무시하고 사용한다면 전달하는 내용이 너무 빈약해질 것이다. 이는 공학이나 법률용어에서나 쓰일 말이다.

게리멘더링은 영어라지만 순수한 단어가 아닌 일종의 풍자다. 단순히 자의적으로 선거구를 만든다(arbitrary redistriction of constituency)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게리’라는 사람(미국에서 1812년의 선거에서 선거구를 자당에 유리하게 획정한 메사추세츠 주지사)이 했던 행위에 대한 풍자가 있고 또한 이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있다. 우리가 자주 쓰는 한자의 고사성어(故事成語)와 같은 것이다.​

만약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자의적 선거구 획정’이라며 비난하는 것과 ‘게리멘더링’이라고 하는 비난 중 어떤 것이 시민에게 더 와 닿는 호소가 될까. 게리멘더링이라고 해야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게리멘더링은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알 수 있는 말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 과학상식’에서 인용되었을 만큼 기초적인 단어다. 굳이 풀어써야 할 필요도 없으며 정 설명을 하고 싶으면 스토리와 함께 별도로 해설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우리가 쓰는 단어는 그냥 명시적인 의사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숨겨진 느낌과 감성 그리고 스토리를 포함하여 전달하고 있다. 쉬운 우리말은 단순히 초등학생 수준의 이해력으로 일아 듣는 말이 아니다. 보통의 사람이 전체적인 분위기와 함께 내면적인 느낌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이면 좋다. 단어가 나오게 된 스토리와 의미, 교훈 등을 동시에 알아야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무조건 길게 풀어써도 안 된다. 운율도 있기에 글자 수의 리듬도 있어야 한다. 감성적인 부분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 기억을 할 수 있다. 사람의 두뇌는 스토리를 통해 기억하도록 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 고유의 단어도 마찬가지다. 모순(矛盾)이나 적반하장(賊反荷杖)에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으며 단어의 리듬이 있기에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어려운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한다는 주장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옮겨야 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불필요한 외국단어를 쓰거나 과도한 현학적인 표현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외국어만 쓰면 유식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다만 국수주의자처럼 시야를 너무 좁히면 안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미 우리말처럼 된 단어는 받아들이고 이를 우리말로 할 때는 기계처럼 단순히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연구를 거쳐 다듬어야 한다. 숨겨진 느낌과 역사 그리고 스토리를 감안해야 한다. 다행히 한글은 한자와 달리 이상한 발음이 있는 외국어 표현도 표기할 수 있는 글자다.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외국 단어를 우리 단어로 옮기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다. 게리멘더링을 우리 단어로 바꾼다면 스토리를 포함시켜야 하니 ‘게리’라는 사람 이름은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 멘더링은 도마뱀이나 용이니까 ‘게리 괴물을 닮은 선거구 만들기’가 되는데 너무 어색하다. 그래서 스토리는 빼고 의역하거나 교훈만 강조하는 단어로 만들게 되고 전혀 다른 느낌이 나오게 된다.

글을 쓰는 것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같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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