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 진남문.

   
▲ 동문 위에서 바라본 읍성안 전경.

   
▲ 동문 잠양루.

   
▲ 동문 잠양루와 성벽.

   
▲ 복원된 서문 지성루.

   
▲ 복원된 서문 지성루와 주변 성벽.

   
▲ 성밖 북서쪽 해차.

   
▲ 성안에서 바라본 진남문.

   
▲ 해미읍성 객사.

   
▲ 집무모습 디오라마.

충남 서산시 해미면은 가야산을 배경으로 한 천수만 입구 고을이다. 바다가 가깝고 해로가 발달하면서 해안과 내륙을 잇는 길목이 됐다. 농수산물이 풍부해 신석기,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부장리고분군 등 산재한 유적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는 마시산군 영현 우견현이었다가 곧 여촌현이 된다. 삼국 통일 후 신라 여읍현으로 혜성군 영현이 된다. 고려 예종원년(1106년) 비로소 감무를 둔다.

고려 말 우리나라 서해안은 국정 혼란을 틈타 왜구가 극성을 부린다. 해미는 운산과 함께 당시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余美縣) 두 고을이었다. 그런데 끊임없는 왜구 약탈로 백성들이 이주해 폐허로 변한다. 이에 조선 태종7년(1407년)두 고을을 합치고, 두 현 이름 한 글자씩을 따 해미현(海美縣)이라 이름 짓는다. 태종13년 수령 현감을 배치한다. 태종18년(1418년)충남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이하 충청병영)을 해미현으로 옮겨온다. 서해안 가까이 왜구 준동을 막기 쉬운 위치이기 때문이었다.

성곽은 성종22년(1491년) 처음 축조한다. 초축과 규모, 위치 등은 ‘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돼 있다. 문종실록에는 해미내상성(內廂城)이라는 다른 이름이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해미읍성과 동일한지 여부로 논란이 일고 있다. 읍성을 쌓은 후 치治소所가 되기까지 해미현 관아는 오늘날 해미면 반양리(구. 해미)였기 때문이다. 읍성은 초축 당시 성벽을 따라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이란 별칭도 얻게 된다. 충청병영은 효종3년(1651년) 충북 청주로 옮겨갈 때까지 230년간 존속한다. 해미현은 한동안 수령 현감이 다스린다.

그러다가 인조 5년(1627년)부터 정3품 무관직이 배치된다. 이 직제가 ‘현縣감監겸兼영營장將’이다. 행정직을 겸하는 군 지휘관이란 뜻이다. 정묘호란 후 조선은 각 도에 전, 후, 좌, 우, 중영을 설치한다. 이에 충청병영성도 호서좌영성이 된다. 수령 현감 또한 행정, 군사권을 겸하는 인물이 배치된다. 문관 행정직을 군사적 조예가 깊은 무관직이 겸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호서좌영장도 해미현감을 겸하게 된다.

아울러 해미현 관아도 좌영과 합치게 된다. 해미현 호서좌영은 1914년 폐지된다. 이때까지 내포지방 13개 군현을 관할한다. 호서좌영성이 해미읍성으로 함께 불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일 것이다.

해미읍성은 이순신 장군이 10개월간 근무했다고 전해진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전인 선조 12년(1579년) 군관(초급장교)으로 부임한다. 그는 옷과 이부자리만 챙기는 청렴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비록 상관이라도 규율을 어기면 반드시 지적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당시 신자 1천여 명이 붙잡혀와 감금, 폭행, 고문 당하는 순교지로가 된다.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한 회화나무(호야나무)가 지금도 당시를 증언한다. 신자들을 패대기쳐 처형했던 자리개 돌과 빠트려 숨지게 한 ‘늪’도 읍성 서쪽과 북쪽에 각각 남아 있다. 늪 주변에는 해미순교성지 성당이 들어섰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성지와 해미읍성을 방문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내포지방 농민군 집결지였다. 홍주성을 공격하고 퇴각하던 농민군은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간직한 해미읍성은 지금도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일대 옛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체성은 북동쪽 해발 130m 구릉지와 동남쪽 평지를 감싸고 있다. 성벽 위로 여장과 옹성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성벽은 둘레 1. 8km 높이 5m 가량이며 폭은 2m 가량이다. 안쪽은 경사지게 흙으로 쌓아 축성방식은 내탁식으로 분류된다. 그라나 바깥은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하단은 굵고 큰 장방형 석재를 놓았다. 위로 갈수록 크기가 작은 성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엇갈리게 쌓아 올렸다. 전형적인 조선조 평지성 성곽 축조방식이다.

안팎 구조를 달리한 이유는 공격이 어렵고 방어를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장과 옹성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바깥 외벽마다 충청도 각 고을 이름이 각인돼 있다. 남문 진鎭남南문門 왼쪽 성벽에는 하단에 ‘공주’, 동문 방향 성벽 하단에는 ‘충주, 임천’ 등 한자가 새겨져 있다. 구간별 축조담당을 명시해 붕괴 시 책임과 보수 의무를 묻기 위한 조치다. 성문은 전형적인 평지성 4대문 양식이다. 다만 북문은 없고 서북쪽에 작은 암문을 두었다. 주출입구는 진남문으로 아치형 홍예문이며 문루가 서 있다. 동문과 서문은 1974년 옛 모습을 유추해 복원했다. 동문 문루에는 잠岑양陽루樓, 서문 문루에는 탱자성을 의미하는 지枳성城루樓 편액이 각각 내걸려 있다.

체성 밖으로는 빙 둘러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북쪽에 남은 해자 670여m만 복원됐다. 읍성은 군사, 행정, 교육, 상업 중심지로 지방 관아가 자리한다. 그러나 외적 침입 등 전시에는 군, 관, 민이 집결, 장기 농성 또는 전투를 벌이는 관방시설이다. 해미읍성도 한말까지 치소임을 말해주듯 관아 건물이 즐비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학교와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며 모두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1년 발굴로 객사와 아문지가 확인돼 발굴과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현재 동헌과 내아, 객사, 그리고 북쪽 언덕위에 누각 청淸허虛정亭이 복원됐다. 천주교 신자들을 감금했던 옥사는 터를 발굴해 1935년 발간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새로 지었다. 그밖에 관광객을 위한 부농과 말단관리, 상인의 집 등 민속마을이 새롭게 터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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