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해부 관아 터
▲ 영해부 관아 터
 
   
▲ 영해도호부 수령 공적비

 

   
▲ 서쪽 2중기단 체성

 

   
▲ 상대산 정상 관어대

 

   
▲ 관아 건물 책방관사

 

   
▲ 북동쪽 해자 추정지

 

   
▲ 객사 터 성벽

 

   
▲ 북서쪽 치성 하단 추정지

경북 동해안 영해고을은 남쪽 경주, 북쪽 강릉과 겨룰 만큼 위상이 드높았다. 남쪽은 영덕읍, 북쪽은 강원도 평해와 울진, 서쪽은 영양과 가깝다. 지리적으로 해안이고 비옥하고 너른 들판이 인접해 있다. 많은 인구가 몰려 살았고 생산력 또한 이웃 고을보다 높았다. 사통팔달 교역으로 상거래 또한 활발했다. 삼한시대 우시국, 삼국시대 고구려 영토 우시군이었다.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년(757년) 유린군이 된다. 북쪽 명주(오늘날 강릉) 영현이었다가 고려 초 ‘예주’로 바꿨고, 외침에 대비해 군사지휘관 방어사가 부임한다.

영해는 고려 고종 46년(1259년) 무인정권 붕괴에 일조한 위사공신 박송비 출신지다. 이때 고종은 공적을 치하해 ‘덕원’이라 이름 짓고 ‘소도호부’로 승격시킨다. 이어 오늘날 ‘시’ 단위에 해당하는 ‘예주목’으로 등급을 올린다. 충선왕 2년(1397년) 전국 ‘목’을 없애 예주목은 영해부로 강등된다. 현 지명 ‘영해’가 이때 생겨난다. ‘바다가 편안한 고을’이란 뜻이다. 조선 태조6년(1397년) 군사시설 ‘진영’을 설치하고 부사직을 병마사로 하여금 겸하게 한다. 영해는 태종13년 진영을 없앨 때 현 ‘도’와 ‘시’ 중간 행정단위인 ‘도호부’로 승격시킨다. 이때 영덕, 영양, 청송, 기성, 우산 등이 귀속된다. 조선 고종 32년(1895년) 영해군이 돼 안동부에 귀속된다. 일제강점기 1914년 영덕군에 병합돼 ‘면’으로 전락한다.

영해는 해안가 고을이다. 고대로부터 왜구의 약탈이 잦았다. 고려 말에는 축산도까지 몰려와 수군이 격파한다. 하지만 크고 작은 약탈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고려 우왕 때 관방시설 겸 군사행정치소 읍성을 쌓는다. 이때 읍성은 다른 성곽처럼 토석혼축성이었다. 축성과정은 당대 유학자 양촌 권근이 쓴 ‘영해부서문루기’로 알 수 있다. 양촌은 1390년 영해로 귀양 와 있던 중이었다. 양촌은 축성 내력과 백성의 생활상, 풍습 등을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영해읍성은 고려 우왕 10년(1384년) 7월 경상도원수 윤가관의 건의로 쌓는다. 계림(오늘날 경주), 안동 군사 2천여 명이 동원돼 한 달 만에 완공한다. 외적을 방어하는 한편에서 성곽을 쌓은 것이다. 기문에 당시 급박한 정황이 읽혀진다. 규모는 둘레 1,278척 높이 13척 성안 우물 3기, 못 1기 등이다. 이후 침범이 뜸하고 고을에 평안이 찾아온다. 이후 조선 세종 30년(1448년) 부사 박쟁시에 의해 수축된다. 면적은 약 7만 4,440㎡ 둘레 1,040m 높이 약 2.6m 등이다. 이때는 토석혼축성을 완벽한 석성으로 보강했을 것이다.
영해읍성은 동, 서, 남, 북 4대문과 암문격인 허문, 시문 등이 있었다. 편액은 서문루(해안루), 동문루, 남문루(진남루), 북문루(북양루), 읍선루 등이었다. 이는 ‘영영승람’, ‘교남지’, ‘해동여지도’, ‘여지도’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동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누각과 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영해읍지나 해동여지도 등에 편액도 없고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중기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서문은 1381년 왜구에 의해 소실됐다가 3년 뒤 중건된다. 그러나 1388년 또 소실돼 병마사 박문부에 의해 재건축된다. 읍성은 동쪽은 낮고 남쪽은 좁다. 이에 성안 대로와 너른 들판을 만나는 서문이 주출입구로 이용됐을 것이다. 남문 ‘진남루’는 문루와 옹성을 갖추었다. 부사 홍상인에 의해 1723년 중수됐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여지도’에는 서문과 남문 모두 옹성을 갖춘 형태다. 북문의 존재 여부는 ‘여지도서’ 기록이 유일하다. 초기 축성 시 북문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읍성 안 건물로는 동헌과 객사, 작청, 대동청, 군기청, 형옥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읍성 철거령’으로 체성과 함께 사라진다.

영해읍성은 고종8년(1871년) ‘이필제의 난’ 또는 ‘영해동학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진 현장이다. 이필제는 철종 14년(1863년) 동학에 입도한다. 충청 홍주 출신 몰락 양반이었으나 정치적 야망이 컸다. 그는 1871년부터 진천, 진주 등지에서 변란을 주도하다 실패한다. 이후 영해로 피신해 또다시 봉기를 일으킨다. 그는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게 영해 교조신원운동을 건의한다. 최시형은 그를 의심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끈질긴 설득과 교도들이 동조하자 마침내 동원령을 내린다. 이때 경상도 일대 16개 ‘접(동학 조직)’ 교도 500여 명이 나선다. 이필제는 교조 수운 최제우가 순교한 음력 3월 10일 우정동 병풍바위에서 소 두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낸다. 이어 한밤중 무장 교도들을 이끌고 읍성을 공격한다. 이들은 군기고와 창고를 점령하고 영해부사 이정을 탐관오리로 규정, 처단한다. 그는 관아 금고의 돈을 꺼내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재차 영덕읍성 공격을 촉구한다. 그러나 도인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는 관의 추격을 피해 영양 일월산으로 몸을 숨긴다. 그해 8월 이필제는 문경에서 또 변란을 획책한다. 그러나 사전 밀고로 붙잡혀 처형된다. 영해 ‘이필제의 난’은 동학 최초 ‘교조신원운동’이자 반봉건 농민운동으로 평가된다.

영해읍성은 지금도 옛 모습이 일부나마 남아 있다. 동쪽 성벽은 일직선이다. 남쪽 성벽은 동쪽에서 꺾어져 서쪽으로 일직선을 그린다. 남서쪽 서북쪽은 반원형이다. 전체적으로 동남쪽을 중심으로 부채를 편 형태다. 체성을 따라가 보면 골목과 궤도를 함께하는 구간이 많다. 간간이 건물 축대가 된 성 돌이 눈에 띈다. 체성 형태는 북서쪽 허문(암문 추정) 터와 서문 터 사이가 가장 온전하다. 면사무소 서쪽 개인 주택 안쪽에 마치 이 집 담장처럼 보인다. 성벽 형태는 축성 초기 옛 모습 그대로다. 길이 30여m로 2단 석축을 이루고 있다. 조선 초기 ‘축성신도’에 따른 축조방식이 엿보인다. 하단은 굵은 장방형 바위를 놓고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성 돌을 쌓았다. 안쪽은 깎아낸 흙벽이다. 이런 성벽은 안쪽 높이 1m가량이지만 바깥 높이는 6∼7m로 제법 웅장하다. 최근에는 체성 석축 또는 해자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굴됐다. 북서쪽 긴 하천은 해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해도호부 동헌 터는 현재 면사무소가 차지했다. 마당에 비석 14기가 줄지어 서 있다. 영해를 거쳐 간 목민관들의 송덕비들이다. 면사무소 옆에 옛 건물이 한 채 보인다. 부사를 보좌하던 아전들이 근무하던 공간이다. 영해 근대역사문화거리 조성사업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면사무소 앞 공터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다. 동남쪽에 읍성 안 식수원 옛 우물이 복원돼 있다. 동헌 앞은 객사가 있었다. 임금 궐패를 모시고 수령이 망궐례를 올리던 건물이지만 지금은 터만 있다. 그 터 축대를 장방형 돌들이 남북으로 질서정연하게 감싸고 있다. 마치 읍성 안 또 다른 내성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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