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자형 해자 전경

   
▲ 개거식 동문 견룡문 누각

   
▲ 동문 견룡문 성루와 옹성

   
▲ 동문 견룡문 옹성 출입구

   
▲ 동문 견룡문

   
▲ 동문 누각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성벽

   
▲ 동문 반원형 옹성위에서 본 모습

   
▲ 동문 옹성 밖에서 본 전경

   
▲ 동문 옹성안에서 바라본 북쪽 성벽

   
▲ 해자위 도개교

  조선시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성내동 일대는 웅천현(熊川縣)이었다. 현은 지방 행정 최하위 고을이다. 주(州),부(府),군(郡),현(縣) 중 가장 낮다. 지금의 읍,면에 해당한다. 웅천현은 1895년 갑오개혁으로 웅천군(郡)으로 승격한다. 이때까지 독자적인 지방행정구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8년 창원부에 소속된다. 이어 일제강점기 1918년 창원군 웅천면, 1973년 진해시 웅천동으로 변천을 거듭한다. 지금은 진해시가 창원시와 통합돼 있다. 웅천도 진해시가 구(區)로 전락하면서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이 돼 있다. 남해안과 가까운 웅천은 제포(薺浦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일명 괴정마을)라는 포구를 해안 가까이 두고 있다.

제포는 부산에서 진해로 가는 중간 기착지다. 부근에 옛 사화랑(莎火郞)봉수대와 옛 보평역(報平驛)이 있다. 제포와 웅천은 김해, 창원, 안골포 등과 도로가 이어진다. 제포에는 고려 공양왕 2년(1390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곽이 있다. 지금은 해안가 100여m 가량 성벽만 남아 ‘제포성터’로만 알려져 있다. 제포는 조선 초기 태종 7년(1407년) 펼친 선린정책으로 일본과 무역항으로 개항한다. 이에 상주하거나 오가는 왜인들의 거래도 빈번해진다. 이에 세종18년(1437년) 마산(당시 합포) 우도수군첨절제사영을 제포로 옮긴다. 왜인들의 불법 이주를 막고 무역활동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성종 16년(1485년) 제포에서는 고려시대 성곽 재수축을 시작, 이듬해 우도수군첨절제사영성으로 완공한다. 이곳은 안골포, 사량, 당포, 영등포, 옥포, 평산포, 적량 등 예하 수군진성을 관할했다. 그러나 뒤에 다시 부산으로 옮겨진다. 제포에는 수군만호진만 남게 된다. 제포 수군만호진성은 웅천뿐만 아니라 창원을 방어하고 마산포 조운을 도왔다. 이곳 앞바다에 섬 가덕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원균(元均)이 왜군 함대와 격전을 벌인 곳이다. 제포는 군사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제포는 현 치소 웅천읍성과 함께 3포 왜란으로 우리 역사에 등장한다. 3포는 왜인들의 왕래와 거주가 허락된 남, 동해안 포구 3곳을 말한다. 세종 25년(1443년) 조정은 일본과 조선의 무역을 허락한다는 계해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동래 부산포, 울산 염포와 함께 웅천 제포를 개항한다. 초기에 상주를 불허한 왜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각각 60여 명만 거주하도록 한다. 아울러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왜관도 설치한다.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3포를 근거지로 무역 특혜까지 누린다. 그런데 왜인들은 약속을 어기고 점차 상주 인원을 늘린다. 마침내 가구가 500여 호가 되자 조선 사람들과 충돌이 잦아진다. 중종은 즉위 후 3포 왜인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은 중종 5년(1510년) 대마도 지원을 받아 3포에서 일제히 난을 일으킨다. 제포에도 왜인들이 300 여명 가까이 상주하고 있었다. 왜인들은 제포 첨사 김세조(金世釣)를 살해한다. 이어 제포와 군사행정 치소인 웅천읍성까지 점령한다. 조정은 급히 토벌군을 보내 왜인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제포와 웅천읍성을 탈환한다. 이후 3포는 폐쇄된다. 그러나 2 년 뒤 조·일간 임신약조(壬申約條)로 제포만 다시 개항하게 된다.

제포 북쪽 1km지점에 옛 웅천현(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성내동)에는 삼포왜란 격전지 웅천읍성이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세종 16년(1434년) 김해읍성과 함께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읍성은 지방 거점 고을에 군사행정 기능을 복합시켜 축조한 성곽이다. 웅천읍성은 개항과 함께 왜인 불법이주를 막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는 명분이 더해진다. 3포 개항 후 왜인들의 가장 큰 거류지가 가까운 제포였기 때문이다.

축성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랍(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웅천지(熊川誌) 등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요약해보면 1434년 초축, 1453년 증축, 창녕과 진주 백성을 동원해 축성한다. 시설물로는 객사, 동헌,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사령방, 관노방 등이 있었다. 4대문 이름은 동문 견룡문(見龍門), 서문 수호문(睡虎門), 남문 진남루(鎭南樓), 북문 공신문(拱辰門)이었다. 대문마다 반원형 옹성을 두었다. 웅천읍성은 성벽이 상당구간 남아 있다. 동남쪽은 바깥쪽 한 면만 성 돌을 쌓은 내탁식이다. 동북쪽은 체성에 계단을 두었다. 이는 1434년 초축 당시와 달리 1453년 증축을 보여준다. 읍성 안에서는 발굴결과 분청사기나 백자, 옹기 조각이 다량 출토됐다. 분청사기는 임진왜란 이전 대량 제작된다. 나머지 자기는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것이다. 체성 중간지점에는 외적의 성벽 공격을 옆에서 공격하는 사각형 치성을 두었다. 성곽 전체 형태는 동서로 성벽이 길고 남북이 짧은 장방형이다. 주변에 높은 야산이 없다. 평탄지에 쌓아 평지성이라고 볼 수 있다. 특이점은 체성 밖 일정한 거리에 폭 3∼4m 깊이 1m 내외 해자를 팠다. 해자는 체성을 따라 S자 형으로 휘어진 형태다. 그 위로 도개교를 놓아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해자 바닥에는 적이 넘지 못하도록 박아놓은 나무말뚝이 확인됐다. 웅천읍성은 현재 동문 견룡문과 일대 성벽만 복원돼 있다. 나머지 삼면은 체성 복원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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