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문 인근 성벽 모형과 벽화

   
▲ 성벽이 있던 골목길

   
▲ 옥골샘

   
▲ 울산 동헌안 수령 공적비군

   
▲ 울산관아 살림집 내아

   
▲ 울산읍성 남문 터 추정지

   
▲ 울산읍성 표지판

  울산은 조선 초 울산도호부로 출발한다. 그 이전 고려 초기 신라 하곡현에 우풍현과 동진현을 합친 울주가 그 기원이다. 원래 흥례부 혹은 흥려부를 두었다가 공화현으로 강등됐다가 다시 울주로 승격된다. 고려 현종9년(1018년) 울주에 방어사를 두었으며, 이후 지울주사로 개칭된다. 조선 태조6년(1397년) 병마사가 지울주사를 겸하도록 한다. 태종13년(1413년) 울주를 울산군으로 개명한다. 태종 15년(1415년)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영에 울산군 읍치를 둔다. 세종9년(1427년) 병마도절제사영을 없애고 읍치를 서쪽 7 리 지점으로 옮긴다. 세종12년(1466년)에 지울산군사를 울산군수로 개칭한다. 세종19년(1437년) 병영을 복구하고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그 해 바로 울산군으로 낮춘다.

조선 조 울산의 읍치는 두 곳으로 비정된다. 초기 읍치는 태종 9년까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 터에 있었다. 읍성이 병영성과 역할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9년(1427년)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초기 읍성을 병영성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울산 중구 옥교동으로 새로운 읍성을 쌓고 읍치를 옮기게 된다. 울산 중구는 고려시대 이래 치소였다. 고려 우왕 11 년 이미 왜구에 대비해 쌓은 토성이 있었다. 읍치 이전 후 성곽 수축 시기는 1477년(조선 성종)대로 전해진다. 이 시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한다. 지금도 이 일대는 ‘성안지‘란 이칭으로도 불린다.
오늘날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울산읍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곽 둘레는 1.7㎞, 높이는 4.5m 이었다. 그런데 120년간 존속하던 울산읍성은 정유재란 때 해체되는 비운을 겪는다. 조·명 연합군에 쫓기던 일본군이 울산왜성(오늘날 울산학성) 축성을 위해 성 돌을 빼내갔기 때문이다. 울산군이 다시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선조32년(1599년)이다. 이후에는 군수 대신 도호부사가 파견된다. 울산읍성은 울산도호부 치소성이 된다.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친 백성들의 공적을 인정한 조처였다. 이후 성 안 관아시설은 모두 재건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철거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른다.

체성은 함월산 남쪽 북정, 옥교, 성남, 교동 일대 옛 시가지를 중심으로 둘글게 펼쳐져 있다. 성벽은 모두 철거됐지만 구간은 지금도 파악할 수 있다. 울산 시가 체성이 지나는 골목을 따라 둘레길을 조성한 덕분이다. 동문 터는 객사 터이자 울산초등 터였던 울산시립미술관 동남쪽에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일제 강점기 개설한 도로가 지나고 있다. 읍성 안 북쪽은 민가 남쪽은 장시가 개설돼 있었다. 지금도 이런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도로가 개설되면서 동문과 서문 터가 잘려나갔다. 객사 학성관 남문으로 울산을 대표하던 옛 누각 태화루도 이때 사라진다.

동문 터에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보면 왼쪽 골목 안으로 체성이 이어진다. 일부 민가 축대를 성 돌이 떠받치고 있다. 골목 북쪽 끝에 해남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1935년 통도사 포교당을 허물고 중건한 ‘설법보전’을 허물고 지은 절이다. 절 바로 앞 객사 터와 동헌 뒤에 방송통신대 일본어 학과동아리실이 있다. 울산 객사와 동헌 비보림 자리로 읍성 안에서 가장 높다. 일제시대 신사 자리다. 당시 여기서 시가지가 다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파트가 사방을 가리고 있다.

해남사 절 뒤에 지금은 옮겨간 옛 울산기상대 터가 있다. 지대가 높아 일제강점기 무선송신철탑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울산측후소가 들어섰다고 한다. 체성은 이 터 입구 서쪽 골목으로 이어진다. 이 동네에도 일부 민가 축대에 성 돌이 보인다. 골목을 벗어나면 곧장 큰 길이 나온다. 교동과 북정동 경계인 다슬길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다가 기상대에서 내려오는 골목과 만나는 지점이 북문 터로 짐작된다. 여기서 체성은 지금 문 닫은 목욕탕 교동보건탕 앞으로 이어진다. 목욕탕을 지나 다시 골목으로 접어든다. 양사초등학교가 있다. 조선조 학숙시설 ‘양사재’란 건물 터다. 학교 서편과 교동 목살골목 사이에 날카롭게 삐져나온 회색건물이 있다. 생김새도 이상하려니와 하부 벽체가 예사롭지 않다. 자세히 보니 울산읍성 치성터가 아닌가 싶다.

읍성 서문도 도로 개설로 사라져 위치 가늠이 어렵다. 다만 도로 남쪽 인도일 것으로 짐작된다. 도로 남쪽 국민은행 울산지점은 과거 읍성 안 ‘연지’라는 반달 모양 연못 터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매립해 우시장과 성남시장 등 장터가 됐다가 우시장이 옮겨간 뒤 지금은 건물이 들어섰다. 체성은 성남시장과 보세거리를 따라간다. 보세거리와 중앙전통시장, 그리고 읍성안 남북도로 학성로가 만나는 시계탑 남쪽 지점이 읍성 남문 터다. 지금은 작은 표식만 있지만 당대 누각을 갖춘 가장 웅장한 성문이었을 것이다. 체성은 다시 시장 안을 가로 질러 나와 동북쪽 골목으로 이어진다. 골목 안 ‘미나레’라는 상가 좌우 담벼락에 만든 옛 성벽 모형이 눈길을 끈다. 좌우로 깃발이 내걸려 있다. 벽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투 장면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모두 성벽을 공격하는 왜군을 맞아 싸우는 그림이다. 군, 관, 민의 치열한 항쟁이 느껴진다.

골목을 빠져 나오니 다시 큰 길이다. 체성은 이 길을 따라 중앙동행정복지센터(옛 울산읍사무소)뒤 대로변 네거리까지 이어진다. 다시 출발지 동문 터로 나온 것이다. 이 일대 동쪽은 신도시 아파트 개발이 한창이다. 도로변을 따라 가면 울산중구문화원 옛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옛 울산면사무소다. 건너편에 새로 개관한 울산시립미술관이 보인다. 울산읍성 객사 학성관 옛 터다. 동헌에서 보면 동쪽이다. 학성관은 일제강점기 초등학교로 변했다. 이후 학교가 옮겨간 뒤 지금은 울산시립미술관이 됐다. 울산도호부 동헌은 새로 세운 관아문 가학루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안을 들어서면 북쪽에 동헌 반학헌, 서쪽에 살림집 내아가 보인다. 가학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울산도호부 시대 지은 건물이다. 울산읍성 관아 터는 전체적으로 잘 정돈돼 있다. 마당을 가로질러 뒷담 작은 문을 나서면 가장 북쪽 절 해남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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