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붕괴가 시작된 성벽

   
▲ 남문 추정지

   
▲ 서남쪽 체성 위에서 본 전경

   
▲ 서남쪽 체성을 안쪽에서 본 전경

   
▲ 서문 터 추정지 체성

   
▲ 점장대 가는 길 축대

   
▲ 집터 뒤 체성

   
▲ 칠포교회 뒤 바깥 성벽

   
▲ 칠포교회 뒤 바깥에서 본 체성 기단부

   
▲ 해안방향 체성 발굴예정지

 경북 동해안은 예로부터 북쪽 함경도에서 쳐들어오는 동예 해적과 바다 건너 왜구의 약탈로 피해가 심했다. 이 때문에 해안 고을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했다. 사람이 살면서 겨우 형성된 고을도 병화를 당하고 나면 무인지경이 됐다. 조정에서 수령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병화로 폐허가 된 고을은 현지 부임을 기피할 정도였다. 신라 시대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황은 대동소이했다. 해안 위주의 국방력 강화는 국가의 선결 과제가 됐다. 해안 군사행정 치소마다 관방시설을 갖추기 시작한다. 지금껏 자취가 전해지는 해안 고을 읍성과 산성, 진성, 봉수 등이다.

일본과 가까운 경북 동해안도 마찬가지로 지리적으로 왜구의 침입이 항시 우려됐다. 이에 조선 중종 때 해안 군사요충지마다 수군진을 두게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당대 수군진영이 기록돼 있다. 그중 경북 동해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경주부 감포영, 영해도호부 축산포영, 영덕현 오포영, 청하현 개포영, 장기현 포이포영, 영일현 통양포영, 흥해군 칠포영 등이다. 지정학적으로 모두 해안가로서 국방전략 상 요충지다.

칠포영은 앞서 영일현 통양포에 쌓은 통양포진을 옮겨와 한동안 통양포진으로 불리었다. 통양포진은 고려 우왕13년(1387년) 영일현 통양포(현재 포항 북구 두호동)에 있던 수군만호진이었다. 초기 수군이 주둔하고 병선이 배치됐다. 그러나 바람이 심해 군사전략적으로 방어에 적합하지 않게 된다. 이에 북쪽 이전을 결의한다. 이어 중종10년(1510년) 북쪽 6km 가량 떨어진 칠포 해안으로 옮기게 된다. 고대로부터 성곽은 많은 군사와 인근 고을 백성들이 동원돼 일정기간 안에 쌓는다. 그러나 고대 성곽은 언제 누가 쌓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칠포진성은 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체성 하단에 ‘정덕십년을해조축성’ 9자가 새겨진 성 돌이 발견된 덕분이다. 조선 중종15년(1515년)이다. 삼포왜란으로 일본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된 시기다. 그러나 중종 때 축성은 신축보다 개축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세종3년(1421년) 경상좌도 동해안에 수군만호영 11개소를 두었고 칠포도 이에 포함된 때문이다. 수군만호영도 대부분 성곽을 쌓고 방어한다. 고성 소을비포진성도 초기 수군만호영 성곽이었다.

칠포는 본래 한문 ‘옻칠’ 자를 쓴다. 옻이 많은 포구란 뜻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일곱 칠’ 자로 바꾸었다. 칠포진성은 지금도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다. 칠포해수욕장에서 해안로 따라 북쪽으로 가면 암각화로와 만나는 곤륜산 삼거리다. 여기서 500여m 북쪽으로 더 가면 칠포교다. 다리 아래 고현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흐른다. 영락없이 해자가 떠오른다. 성곽 남동쪽 방어선이다. 다리를 건너면 마을과 항구다. 체성은 칠포교회 뒤에서 북서쪽과 동남 해안가로 뻗는다. 일부 구간은 마치 민가와 교회 담장처럼 보인다. 칠포리 마을회관 뒤 한 민가와 다방 터는 건물이 헐리고 공터로 남아 있다. 문화재 발굴을 위한 출입금지 표시판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마을 안 집터에 온전한 길이 20m, 높이 2m가량 성벽이 드러나 있다. 무너지기 직전이지만 성문터와 함께 현재 발굴 복원이 진행 중이다.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축성 방식은 일부 양쪽 성벽을 세우고 흙과 잡석을 채워 넣은 협축식과 땅을 깎아내고 한쪽 성벽만 쌓은 뒤 안을 채운 내탁식이 혼용돼 있다. 성 돌은 하단부나 외벽은 일부 다듬어 쌓았지만 무너지지 않게 끼운 돌은 주로 잡석이다. 공터 북쪽 밖은 각이 진 체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흔히 치성이나 성문터에서 볼 수 있는 형태다. 이 근처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골목을 건너 공터가 또 있다. 체성이 지나간다면 땅속에 기단석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체성은 마을 가운데 칠포교회 뒤로 이어진다. 이 구간은 교회건물 뒤 담장처럼 착각할만하다. 상부 체성은 없고 성 돌 위에 벽돌담을 쌓았기 때문이다. 마치 벽돌담을 떠받치는 초석처럼 보인다. 상단부 체성은 사라진 채 기단만 남아 있는 현장이다. 그러나 하단부는 70∼90cm 굵은 바위를 다듬어 빈틈없이 줄지어 놓았다. 누가 봐도 옛 성벽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 옆집 뒤에서 담장처럼 체성이 이어진다. 안쪽에서는 높이가 1m에 불과하다. 그러나 밖에서 보니 2m 정도로 제법 높다. 기단석으로 짐작하건대 높이 3m가량의 웅장한 성벽이 연상된다.

해안에서 시작해 마을 안을 거쳐 산자락을 감싸는 체성은 600여m로 추정된다. 체성은 해안에서 출발해 북서쪽 야산자락으로 이어진다. 따라가 보니 산 위로 이어진다. 대충 어림잡아 폭 1m가량 길로 추정된다. 주변은 축대처럼 성 돌들이 빼곡하게 박혀 떠받치고 있다. 야트막한 산 위에 갑자기 너른 터가 보인다. 칠포영성 지휘소 또는 점장대 터로 여겨진다. 시누대가 북풍을 가리며 자라고 있다. 이곳에서 대숲 사이 저 멀리 영일만과 호미반도가 조망된다. 조선조 동해안을 지키던 수군진성의 웅장한 윤곽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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