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지지 않은 서북쪽 성벽

   
▲ 문수산성 서쪽 평탄지 건물 터 체성

   
▲ 문수산성 서쪽 평탄지

   
▲ 서쪽 성문 터 추정지

   
▲ 산성 진입로겸 임도

   
▲ 산자락을 깎아내고 쌓은 내탁식 성벽

   
▲ 서북쪽 오르막 구간 체성

  울산광역시 청량면 율리와 법서읍 천상리 경계지점에는 해발 353m영취산과 600m 문수산이 우뚝 솟아 있다. 두 산 모두 사방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쉽게 시야에 들어온다. 가히 울산을 대표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영취산은 불교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석가모니가 설법했다는 인도의 산이다. 불교가 들어온 뒤 전국 곳곳에 영취산이란 이름이 생겨난다. 대동여지도에는 무려 8곳이나 등장한다. 울산 영취산에는 신라시대 영축사, 망해사, 청송사가 자리 잡는다. 그러나 폐사됐다가 영축사 이외 다른 절은 근대 다시 법등이 켜졌다. 영취산은 삼국유사에 네 차례 이상 등장한다. 우선 661년 서라벌 동자승 지통(智通)이 울산 영취산 혁목암(赫木庵) 낭지(朗智)를 찾아가 제자가 된다는 기록이다. 여기 등장하는 혁목암은 현재 문수산 자락 청송사지 일대로 추정된다. 또 삼국유사에는 영취사 스님 연회(緣會)의 얘기가 나온다. 신라 원성왕(재위785~798)은 연회를 국사(國師)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낸다. 그러나 연회는 거부하고 문수점(文殊岾)쪽으로 몸을 숨기지만 끝내 국사가 된다. 여기서 문수점은 문수사로 추정된다. 바로 옆 산 능선이 붙은 문수산은 영취산보다 더 높다. 불교에서 부처 열반 후 태어나 반야의 지혜를 증득한 문수보살 이름을 딴 산이다. 신라시대 이 산에는 문수보살이 산세가 청량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한동안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두 산과 사찰 모두 불교가 왕성할 당시 신라와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문수산 일대는 고대 울산 중심 치소로 추정된다. 산 아래 신라시대 울산 중심 관아인 ‘굴정현청(屈井縣廳)’이 있었다. 이는 삼국사기 영축사를 짓게 된 배경 설화로 유추해볼 수 있다. 683년 신라 재상 충원공(忠元公)은 볼 일을 보러 이곳에 왔다가 관아 굴정현청에 머문다. 이때 충원공은 공중에서 독수리와 꿩이 쫓고 쫓기는 장면을 우연히 바라본다. 달아난 꿩은 관아 마당가 우물 안으로 숨어든다. 공이 따라가 보니 꿩이 우물 안에서 새끼 두 마리를 날개로 품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감동한 공은 현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 자리에 영축사를 짓도록 한다. 오늘날 영축사는 폐사지가 됐다. 그러나 이 터가 울산 중심 관아 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 고대 지명은 굴아화촌(屈阿火村), 일명 굴화, 갈화, 굴불, 구불, 굴정 등으로도 불렸다. 이후 신라 파사왕대 굴아화현이 된다. 고대 사찰 영축사 터는 문수산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문수산 정상부 둘레를 마치 머리띠를 감은 듯 쌓은 고대 산성이 1 기 있다. 산 이름을 그대로 빌린 ‘문수산성’이다. 주민들은 울산 옛 지명 그대로 ‘굴화산성’이라고도 부른다. ‘굴화’를 다스리던 관아와 산성의 불가분 관련성이 짐작된다. 산성은 평시엔 곡식과 무기를 비축해두고 사람은 거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침이 있으면 관아 주변 군, 관, 민은 산성으로 대피한다. 문수산성도 인근 백성들의 대피 및 방어용 기능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고대 굴아화현(또는 굴화현)은 문수산성 북동쪽 5.5km지점에 있다. 이에 문수산성이 굴아화현 초기 치소(治所 군사행정 중심지)일 가능성도 크다.

문수산성은 서남쪽 양산과 언양을 거쳐 경주에 이르는 길과 방어진과 울산시가지, 언양을 잇는 길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울산과 언양, 양산은 물론 신라수도 서라벌까지 방어가 가능하다. 서라벌은 낙동강에서 양산천을 타고 올라와 육로로 통도사를 거치면 닿는다. 문수산 정상부에서는 동래에서 서라벌, 현 울산과 언양을 잇는 동서남북 네 방향 감제가 모두 가능하다. 이와 함께 유사시 울산과 울주 일대 백성의 대피 및 방어, 장기 농성에 적격인 위치다. 형태는 해발 600m 문수산 8부 능선을 따라 테를 두르듯이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발굴 결과 산성 동남쪽과 정상부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조각이 수습됐다. 토기는 삼국시대 토기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산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산자락을 잘라내고 석축을 쌓았다. 체성 일부 구간은 자연할석과 가공한 성 돌을 서로 물리는 방식으로 쌓아올린 협축식 축성방식을 보여준다. 단면은 사다리꼴로 초기 튼튼하게 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전체 모양은 긴 타원형이다. 체성은 800m, 높이 50∼150㎝ 정도 남아 있다. 성벽은 남서쪽과 북쪽 일대 잘 남아 있다. 그러나 동쪽과 북서쪽은 훼손이 심하다. 동남쪽에는 출입문격인 성문 터가 있다. 안쪽에는 건물 터가 확인된다. 서쪽 산자락에는 제법 너른 평탄지가 있다. 양산, 언양, 경주 방면에 이르는 길을 감시하는 장대 터도 남아 있다. 현재 문수산성에 대한 옛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체성은 등산로 따라 곳곳에서 흔적을 볼 수 있다. 등산로는 임도와 겹치는 구간이 많다. 임도 아래 깎아지른 절벽에 무너진 성 돌이 나뒹군다. 문수산 서남쪽 관음저수지에서 문수사까지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가 나 있다. 체성은 절 입구에서 산 정상까지 난 임도 중 가장 높은 서쪽 임도에서 잘 보인다. 또 너른 평탄지에 건물 터와 물을 모아두던 집수정 터도 눈에 띈다. 평탄지는 체성이 따로 에워싸고 있다. 높이는 1.5m가량이다. 성벽 밖은 천혜의 방어망인 낭떠러지다. 평탄지는 서남쪽 양산과 언양 방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체성은 산자락을 깎아내고 쌓았다. 긴 체성은 임도를 따라 뱀처럼 정상부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도 아래 급경사지에는 성벽에서 무너진 성 돌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문수산 정상부는 산성의 장대 터로 여겨진다. 지금은 방송사 통신탑과 사람 키 두 배 정도의 석탑이 정상석과 함께 우뚝 서 있다.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울산시, 서쪽으로 언양읍과 영남알프스가 조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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