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 터 안 반원형 체성

   
▲ 남문 터 안에서 바라본 동남쪽 체성

   
▲ 남문 터 안쪽 전경

   
▲ 남문 터밖 체성

   
▲ 남문 터안에서 바라본 동남쪽 성벽

   
▲ 암문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서쪽 성벽

   
▲ 치성위 데크 전망대

   
▲ 북문 터

   
▲ 북쪽 체성 밖 전경

   
▲ 서문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서쪽 성벽

 경기 화성시 봉담읍에서 동탄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북쪽 왼쪽으로 우뚝 솟은 야산이 보인다. 경기 오산시 지곶동 162-1 독성산(禿城山)이다. 홀로 또는 외롭다(獨)는 뜻이 아니다. 대머리(禿)처럼 민둥산이란 뜻이다. 오래전 석대산(石臺山), 향로봉(香爐峰) 등으로 불리던 이 산은 조선시대 독성산(禿城山)이 됐다고 한다. 주변은 낮은 평야지대다. 정상에서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다. 멀리 북쪽으로 수원, 북동쪽으로 용인, 서쪽으로 화성이 바라보인다. 이 산 정상에 전형적인 고대 산성이 있다. 산 이름을 따 ‘독산성’(禿山城)이다. 정상부 산자락을 휘감아 쌓은 석성이다.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본래 규모는 둘레가 3.6km나 된다. 지금은 약 400m 내성 체성만 남아 있다. 산성은 동, 서, 남, 북 성문 4기, 암문 1기, 치성 8기를 두고 있다. 초축은 언제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위치가 군사요충지여서 한강 하류에 도성을 둔 백제시대 성곽으로 추정된다. 독산성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성왕 26년(548년) 고구려 평성(平成 : 양원왕(陽原王)의 이름)이 예(말갈족)와 공모해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한다. 이에 백제는 신라에 구원병을 청한다.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진에게 군사 3,000명을 보내 싸워 물리치게 한다. 그런데 산성 이름 첫 글자가 ‘독’(獨)자다. 이곳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일본군을 속여 물리친 ‘세마’(洗馬) 설화가 전해진다. 권율은 선조 26년(1593년) 7월 일본군이 점령한 한양 탈환을 위해 근왕병 2만 명을 이끌고 독산성에 진을 친다. 이때 일본군은 한양 남쪽 보급로 차단을 우려해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사방이 깎아지른 산성인지라 함락하기 어려웠다. 일본군은 산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물이 고갈되기만을 기다린다. 이를 미리 안 권율은 사방이 트인 산 정상에서 말 등에 쌀을 붓도록 지시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물이 넘쳐 말을 씻는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 이를 본 일본군은 아직 식수가 있다고 오인해 퇴각을 결정한다. 말을 목욕시킬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말을 몰아다 놓고 등에 쌀을 부은 자리가 바로 ‘세마대지’다. 이듬해 독산성은 대대적인 증, 개축이 이뤄진다.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그해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 만에 해낸다. 독산성은 임진왜란 후에도 전략적 위상은 중요시됐다. 선조 35년(1602년), 정조 20년(1796년) 잇따라 수축이 이어진다. 이때 포대를 설치하고 원거리 포탄을 피하기 위해 산성 안 건물의 지붕을 낮추었다.

독산성은 봉담∼동탄 고속도로 북오산IC에서 그리 멀지 않다. 또한 그리 높지 않아 비교적 오르기 쉽다. 북, 서쪽 독산성산림욕장과 동쪽 보적사 일주문, 남쪽 세마대 주차장 등지를 출발지로 삼으면 좋다. 동쪽에는 지그재그 차량 진입로도 나 있다. 이 길 끝에 백제시대 지었다는 절 보적사가 있다. 전쟁터 군사의 사기앙양과 숨진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성곽 축조 당시 지었다고 한다. 절 입구가 동문이어서 들어서면 바로 절 마당이다. 동문 안쪽은 옹성처럼 담벼락을 둥글게 쌓았다. 외적이 진입해도 공격당하기 쉬운 구조다. 성문은 현재 모두 성루가 없다. 주 출입구인 남문에만 누각 진남루가 있었다. 성문은 모두 계단으로 진입하고 위로 널찍한 판석이 걸쳐져 있다. 바깥에서 보면 사각형에 가깝다. 이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평거식 성문이다. 읍성 등 다른 일반 성문은 무지개문 즉 홍예식이 많다. 체성은 절 마당에서 남북으로 갈라진다. 동남쪽으로 가면 금방 내리막이 시작된다. 이 구간 체성은 안쪽 높이가 그리 높지 않다. 회곽도와 성벽 위를 번갈아 오르내릴 수 있다. 성벽 위는 폭이 1~2m가량이다. 하지만 밖으로 외발을 내딛었다 간 천 길 낭떠러지다. 체성만 해도 바깥 높이가 3~4m에 이른다. 천연 암반 위 또는 산을 깎아내고 쌓았다. 체성 아래쪽은 위로 공격을 엄두도 못 낼만큼 아찔한 벼랑이다. 이에 성벽 위 보행을 금지하고 있다. 동문을 출발해 남문까지는 체성이 가팔라 내려가야 한다. 동문을 출발해서 남문 쪽으로 가다 보면 각대 지점에서 외부로 돌출한 치성을 만난다. 치성은 모두 8기로 확인된다. 위치가 높아 주로 전망대로 쓰이는 듯하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린다. 체성이 각이 지는 고지대마다 치성을 둔 것이다. 남문이 다가오자 성벽 위에 널찍한 계단을 두었다. 체성 안 회곽도 역시 널찍한 계단이다. 그만큼 이곳 체성 안 지형은 가파르다. 남쪽 체성 가장 낮은 지점에 남문이 나 있다. 남문은 산 아래 세마대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진입로와 만난다. 체성 양쪽은 모서리가 반원에 가깝다. 수원 화성 축성 양식이다. 안쪽에 대문 기둥 돌확이 있다. 남문 안쪽은 산정을 등에 지고 산자락이 에워싼 양지바른 터가 있다. 산성 안 주요 건물 위치로 추정된다. 이곳은 최근 발굴이 한창이다. 체성은 서북쪽으로 이어진다. 남문 터 옆에 둥근 주춧돌이 1기 있다. 둘레가 연잎무늬 장식이다.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된다는 안내문이 있다. 서쪽 체성도 안쪽이 낮다. 바깥은 높이 2∼3m 체성이 긴 S자형으로 뻗어 있다. 이 구간도 체성 밖은 급경사지다. 서문 못 미쳐 또 성문이 있다. 독산성의 유일한 암문(暗門)이다. 물자나 식량 공급을 위해 몰래 드나드는 문이다. 암문을 지나면 금방 서문이다. 서문도 평거식 성문이다. 서문을 지나면 가장 높은 서북 치성이 보인다. 이어 북쪽 체성이 이어지다가 곧 북문이다. 북문 일대도 발굴이 한창이다. 바깥 경사지에서는 삼국시대 석축이 발굴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산성 안 정상부로 세마대지가 보인다. 1957년 지었다는 세마대가 서 있다. 앞뒤 남, 북 처마에는 두 개의 다른 글씨체 편액이 내걸려 있다. 북쪽은 세마대(洗馬臺), 남쪽은 세마대(洗馬坮)이다. 남쪽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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