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쪽 각대지점 무너진 성벽

   
▲ 남쪽 각대지점에서 바라본 서쪽 잔존 성벽

   
▲ 남쪽 성벽

   
▲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각대지점

   
▲ 무너지지 않고 있는 남서쪽 각대옆 남쪽 체성

   
▲ 서문 터 추정지

   
▲ 서쪽 성벽 하단 기단석

   
▲ 서쪽 성벽

   
▲ 서쪽 성벽과 남쪽 각대 지점

   
▲ 서쪽 체성

  부산 강서구 가덕도는 육지와 연결돼 지금은 섬이 아니다. 하지만 다리 연결 전 그냥 섬이었다. 면적은 부산 영도의 1.5배다. 해안 길이는 36km에 이른다. 부산에서는 대저도에 이어 두 번째 큰 섬이다. 북쪽에 부산 강서구 녹산동, 경남 창원시가 있다. 서남쪽은 거제시와 가거대교로 이어진다. 6∼7000년 전 신석기시대 패총이 남아 있다. 또 신석기인 유골 48구가 발굴돼 화제를 모았다. 가야시대로 접어든 7∼8세기 조성된 고분도 있다. 고대로부터 사람이 거주했다는 흔적이다. 가덕도는 고대로부터 해류를 통한 해상교통 중요거점이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육지에서 먼 반면 일본 대마도와 근접해 있다. 이 때문에 남해안에 준동하던 왜구의 침입 경로이자 표적이 되기 쉬웠다. 일찍이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고려사’에 따르면 가덕도는 마산, 동래, 부산, 울주와 더불어 남해안 방어 최전선이었다.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이 일어난다. 삼포는 태종이 개항한 부산포, 제포(웅천), 염포(울산)다. 이곳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대마도주로부터 군사와 병선을 지원받아 관아와 마을을 공격했다. 부산포에서는 첨사 이우증이 살해당한다. 군사와 백성 272명이 피살됐다. 동래현 민가 796호가 불탔다. 제포 바로 옆 웅천은 관아가 있는 읍성까지 점령됐다. 조정은 즉각 군사를 보내 토벌한다. 왜란은 조·일 간 임신약조로 일단락된다. 그런데 중종 39년(1544년)에는 왜인들이 병선 20여 척을 타고 경상도 사량진(경남 통영시 원량면 진리)으로 침입한다. 이들은 사람과 말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에 조정은 국교를 단절하고 왜인 입국 전면 금지를 선언한다. 그리고 왜인의 약탈과 만행에 대비해 해안과 섬 위주로 수군진성(水軍鎭城)을 쌓는다.

이 무렵 가덕도에도 수군진성을 쌓는다. 서남쪽 ‘천성진성’과 북쪽 ‘가덕진성’이다. 조선조 경상우수영 최전선 남해안 방어 요충지가 된 것이다. 가덕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왜군에 의해 수차례 점령된다. 특히 가덕진성은 함락되는 비운을 겪는다. 왜군은 북쪽 섬 눌차도에 성을 쌓는다. 오늘날 눌차왜성 또는 가덕도왜성이라고 불리는 성곽이다. 그들로서도 이 섬이 공격 또는 퇴로 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이순신은 부산포 주둔 왜군 선단을 공격한다.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한 부산포해전이다. 공격 하루 전 이순신 함대는 가덕도에 일시 정박한다. 천성진성을 부산포 출전 교두보로 삼은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수군통제사 원균은 왜군 퇴로를 차단하려고 부산포로 출정했다가 역습을 당한다. 이때 빠져나가 잠시 머문 곳도 천성진성이었다. 가덕도와 수군진성 두 곳이 양란에서 피아간 군사전략적 요충지가 됐던 것이다.

천성진성은 가덕도 연대봉 구릉지 남서쪽 해안가에 있다. 둥근 만이 만들어낸 오늘날 천성항 동쪽이다. 체성은 석축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초기 축성 당시 둘레는 약 700m로 추정된다. 영남진지에는 둘레 약 652m로 기록돼 있다. 잦은 수축 때문일 것이다. 현재 성벽 약 96m, 높이 3.5m가량이 남아 있다. 읍성이나 산성보다 규모는 매우 작다. 주위에 산이 없는 평지성이다. 성문터는 서, 남, 북쪽에 있다. 문 터마다 바깥에 옹성을 두었다. 그런데 동쪽에는 문이 없다. 다만 바깥에 둥근 옹성 흔적이 있다. 북문은 바깥에 옹성이 없다. 안쪽으로 성벽을 길게 들여쌓았다. 안쪽 사각형 옹성 흔적이다. 체성은 남쪽 성벽 일부가 잘 보존돼 있다. 사람 키를 넘고 외벽이 수직 그대로여서 옛 성곽의 위용을 살펴볼 수 있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지만 체성은 형태가 그대로 남은 것이다. 해자 추정 물길은 지금 하천이 돼 있다. 서쪽 각대지점 가까이 서북쪽으로 흐른다. 깊이 1m, 폭 6m가량이다. 동, 남, 서쪽은 없다. 천성진성은 그간 수차례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객사 터가 드러났다. 객사는 사신이나 출장 온 조정의 관리 숙소 겸 북쪽 대궐을 향해 제사 지내는 혼합 건물이다. 주초석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 확인됐다. 터 앞에는 얇은 돌이 깔린 단 형태의 월대도 발굴됐다. 동헌 터도 확인된다. 두께 16cm 지대석을 깔고 위에 6cm가량 기단석을 쌓았다. 동헌 터도 확인된다. 성안을 십자로 구획하면 북동쪽 동헌, 남쪽 객사와 관아 터 등이다. 조선조 기와 조각과 명문 막새기와 조각, 백자 조각 등도 발견됐다. 특히 쇠못을 박아 만드는 갑옷의 미늘(갑찰, 甲札) 580여 점이 수습됐다. 그리고 투구 조각 1점, 철제 화살촉 등이 나왔다. 유물은 치열한 전장 터이자 군사요충지 수군진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마을이 자리한 서, 남쪽 성벽도 길게 남아 있다. 서문 터 일대는 지금 채전이 개발돼 벽체는 없다. 하지만 하단 기단 성 돌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가장 완연한 성벽은 서남쪽 각대 지점 남쪽이다. 이곳 남쪽 성벽은 사람 키를 뛰어넘을 만큼 높다. 외벽은 수직벽, 내부는 완만한 토축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