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숙 작가

봉사가 눈이 안 보이니 손으로 더듬더듬 옥문을 만져보고 긴 막대기로 딱딱 바닥을 치며 옥문 앞에 서서는 휘파람을 휙휙 불었어.
“무엇이 궁금하냐?”
“악몽을 꾸었소. 꿈풀이 좀 해 주오.”
“나는 용하다고 소문난 만큼 좀 비싸다. 보겠느냐?”
“걱정마오. 풀이나 잘해주소. 혹시 내가 죽는 꿈이 아닌지 잘 들어보오.”
춘향이가 꿈 얘기를 하자 다 듣고 난 허 봉사가 손뼉을 짝 쳤어.
“그 꿈 한번 좋구나. 꽃이 떨어지니 바라던 열매가 맺을 것이며 거울이 깨지니 그 소리 또한 대단할 것이고, 문 위에 허수아비 있으니 만백성이 우러러볼 것이오, 바다가 말랐으니 그 속의 용을 볼 것이오, 태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것이니 태산 같은 근심이 사라지고 멀지 않아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
봉사의 해몽을 듣고 나니 믿기지는 않지만 죽을 운은 아닌 듯하여 춘향은 마음이 놓였어.

춘향을 옥에 가둔 변 사또 소문이 얼마나 더럽게 났는지 그를 잡놈ㆍ변태ㆍ악질ㆍ마귀ㆍ귀신, 아무튼 나쁜 일에는 변 사또 같은 놈이라는 말을 접두사처럼 붙여서 남원고을에 쫙 퍼져있었어. 몽룡이 어사의 신분으로 남원에 도착하자마자 그 소문을 들었지.
“이놈, 변 사또, 두고 보자. 내 여자를 옥에 가두다니. 내가 이 원수를 꼭 갚으리라. 도저히 용서 못 해.”
수청을 거절한 춘향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들은 몽룡은 이를 뿌드득 갈며 두 주먹 쥐고 부지런히 길을 서둘렀어. 그러면서도 자신을 향한 춘향의 마음은 그대로인지 아니면 변했는지 알고 싶었어.

“춘향아, 내가 왔다.”
춘향의 쑥대머리 모습을 본 몽룡은 자신의 여자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눈물이 글썽했어.
“꿈인가 생시인가, 참말로 서방님 맞소?”
어둠 속에 찾아온 몽룡을 본 춘향은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어.
“늦게 와서 미안하다. 할 말이 없구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소.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약속을 지켜주셨구려. 어디 얼굴이나 자세히 한번 봅시다.”
춘향이 크게 반가워하며 몽룡을 가까이서 보니 완전 거지 행색이라. 너무 실망해서 기가 차고 맥이 풀려 절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어.
“에그머니나, 이게 뭔 일이래요? 훌쩍 떠난 뒤에 소식한 번 없이 연락을 딱 끊더니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한양에서 무슨 일 있었소? 집안이 망하기라도 했소?”
희망도 꿈도 사랑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졌어.

“한양가면 저절로 출세하는 줄 알았는데 낭패로구나. 장원급제해서 보란 듯이 금의환향하는 서방님을 기다렸는데 이리되고 말았구나.”
망연자실해진 춘향은 입을 삐죽삐죽 코를 씰룩씰룩 기가 차고 맥이 풀려 억장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어.
“아이고, 아이고, 내 신세야. 장원급제해서 오라고 했더니 거지꼴이 웬 말이오? 공든 탑이 무너지고 수절한 게 억울하네. 가련하고 불쌍한 내 신세야.”
“너무 서러워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듯이 내가 쉽게 무너지겠느냐. 나를 한번 믿어봐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지 않느냐.”
몽룡은 양반이랍시고 곧장 죽어도 큰소리치는 위인이라 춘향이는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혔어.
“매번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시더니 그 꼬락서니로 믿어 보라시면 내가 뭘 믿어 보겠소. 내 꼴도 우습지만 서방님 모양새도 곱지는 못하오.”
춘향은 몽룡의 차림새를 보고는 변 사또에게 수청을 거절한 게 후회스러웠어. 어차피 사라진 희망 앞에 말씨도 본색을 드러냈어.
“춘향아, 오랜만에 만난 서방인데 말 좀 곱게 하여라. 그 고운 얼굴 다 어디 가고 쑥대머리며 나보다 더 심한 행색이구나.”
“내가 왜 이리되었겠소. 정절 지키려고 이 고생 아니오? 내 입에서 어찌 고운 말이 나길 바라시오? 내가 억장이 무너지오.”
“그동안 나를 기다려줘서 고맙다. 나도 춘향이 네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한양에 있는 동안 내 너를 너무 사랑하여 미치는 줄 알았다.”
“소첩은 서방님 사랑한 죄로 여기 감옥에 있지 않으오. 사랑을 먹고 사는 시절은 꿈이었소. 현실을 보시오. 어찌 사랑 타령만 하시오. 출세하여 돌아온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서방님은 모양새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비었소. 애고 애고, 내 신세야. 어찌 이리도 복이 없을 고?”
“춘향아, 나는 너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섭섭한 소리는 마라. 아무리 쑥대머리라도 내 눈에는 그저 이쁘고 사랑스럽구나. 나만 믿고 의지하려무나. 내가 다 해결해주겠노라.”
“아직도 실없는 그 말씀에 속는 내가 밉구려. 지금까지는 그나마 서방님에 대한 희망으로 버텼는데 오늘따라 내 신세가 초라하기 그지없소. 한숨에 실망이 싹트고 두 숨에 절망이 보이며 세 숨에 저승길이 보이는 것 같소.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었나 보오.”
춘향의 독설에 몽룡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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