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문 오른쪽 동쪽 성벽 전경

 

   
▲ 동문 밖 전경

 

   
▲ 동문 옹성 밖에서 본 전경

 

   
▲ 동문 옹성

 

   
▲ 동쪽 성벽

 

   
▲ 산성안 집수정

 

   
▲ 건물 터와 위 터축대

 

   
▲ 동문 터 옹성 개구부

 

   
▲ 동쪽 수문

- 전북 익산은 고대 지명이 ‘금마저’였다. 지금도 금마는 ‘면’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익산은 남쪽으로 백제 수도 부여와 공주를 잇는다. 강은 익산천과 왕궁천, 춘포천이 만경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간다. 익산평야는 만경, 김제와 함께 호남의 옥토로 정평 나 있다. 그만큼 인심이 좋고 살기 좋았던 것이다. ‘금마저’는 마한 이래 고대 백제 땅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554년 관산성(충분 옥천)에서 신라에 패한다. 이어 국운이 크게 기울기 시작한다. 후대 왕들 모두 위기 극복에 급급한다. 이 무렵 30대 무왕이 등장한다. 무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역사를 단행한다. 부여 사비성을 중수하는 한편 출신지 익산에 또 다른 도성을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왕후 가문의 후원으로 백제 최대 규모 사찰 미륵사를 창건한다.

- 1989년 금마면 가까운 왕궁면에서 궁궐 유적이 발견됐다. 유적은 지금까지 수차례 발굴로 다양한 유물, 유구가 확인됐다. 최근에는 후원에 화려한 정원과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유적은 마한 도읍지설, 고구려 유민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 설, 무왕의 천도를 위한 도성 등으로 견해가 분분하다. 하지만 백제 후기 양식이 뚜렷했다. 이로써 백제 30대 무왕이 백제의 도약과 부흥을 꿈꾸던 자취가 서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금마저는 공주, 부여보다 더 화려한 백제문화를 꽃피운다. 무왕은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이었다. 익산 땅 곳곳에는 지금도 ‘서동과 선화‘의 전설이 배어있다. 미륵사는 석탑 1기와 터만 남아 있다. 석탑은 본래 9층탑이었으나 붕괴돼 지금은 6층만 남아 있다.

- 미륵사지 북쪽에 익산 진산 미륵산이 있다. 산 동쪽에 천호산 줄기를 감싸 안고 운장산 등 노령산맥과 이어진다, 남쪽에 만경강, 북쪽에 금강이 흐른다. 미륵산 정상부에서 동쪽방향을 둘러싼 고대 산성이 1기 있다. 둘레 1776m, 높이 2∼5m미륵산성이다. 무왕이 익산에 도성을 옮기려고 쌓았다는 설이 있다. 산성에서는 익산 고대 지명 ‘금마저’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백제시대 초축이며 통일신라이후 자주 개축했던 것이다. 동서(최대길이 680m)가 길고 남북(최대길이 370m)이 짧다. 곡선부가 적은 장방형이다. 성벽은 동쪽 140m, 남쪽 560m, 북쪽 600, 서쪽 390m에 이른다. 북쪽은 산 능선이 그대로 방어망이다. 동, 서, 남쪽 경사지에 체성을 쌓았다. 성문은 주출입구 동문과 남쪽 성벽 가운데 지점, 그리고 서쪽 성벽 모서리에 각각 냈다. 동문은 사각에 가까운 반원형 옹성을 두었다. 지대가 가장 낮은 동문 옆에 수문을 두었다.


- 성곽 답사는 금마면 구룡마을 대나무숲을 지나 20여분만 가면 된다. 군부대훈련장을 지나면 동문이 보인다. 동문 옆에 산길이 나 있다. 길은 동문 안에서 세 갈래 나눠진다. 가운데 계곡을 타는 산길과 좌, 우측 성벽 아랫길이다. 성위는 접근이 금지돼 있다. 동문 안에 수문이 있다. 계곡 물이 밖으로 빠져나가게 만든 시설이다. 좌, 우측 길은 등산로다. 왼쪽 성벽은 남쪽을 향해 고도를 높여 쌓았다. 남문 터 방향이다. 남문 터를 지나면 성벽이 바깥은 석축이고 안쪽은 흙이다. 이러한 내탁식 축성 성벽은 산정을 향한다. 동문 터 오른쪽 성벽은 북동쪽을 향해 올라간다. 이 구간은 성벽위로 올라설 수 있다. 안쪽 회곽도에도 나무계단이 설치돼 있다. 복원 성벽이라 석재가 흰빛이다. 잠시 걸으면 외벽에 붙여 쌓은 직사각형 치성이다. 치성은 모두 10개소다. 하지만 확인가능한 곳은 7개뿐이다. 동쪽 성벽 끝에 북동쪽으로 돌출한 치성이 있다. 동, 북쪽 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공격하기 알맞다. 성벽과 치성 모두 잘 다듬은 장방형 성 돌을 벽돌처럼 쌓았다. 고대 성곽 축성방식과 다소 거리감이 느껴진다.

- 축성 방식은 내외 협축식 또는 내탁식을 보인다. 외벽은 다듬은 장방형 성 돌을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았다. 군데군데 할석을 넣어 균형을 잡기도 했다. 높이는 3∼4m, 폭은 약 4m로 넓고 튼튼하다. 안팎을 지형에 맞게 번갈아가며 높이를 조절했다. 남쪽과 동쪽 일부구간 성벽은 경사가 가파르다. 남쪽 성벽은 동문 터에서 서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남쪽 성벽은 산세가 치켜 올라갈 정도로 가파르다. 이에 성벽 위 또는 안쪽 성벽을 계단처럼 쌓아 지형에 맞추었다. 정상부 남문 터를 지나면 성벽을 쌓지 않았다. 바깥 경사지가 방어망이 된 셈이다. 북쪽 성벽은 동쪽 성벽이 경사지를 따라 오르다 치성 부근에서 꺾어지는 지점이 출발지다. 남쪽 성벽보다 가파르진 않지만 체성은 산위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남북 성벽 모두 미륵산 정상 우제봉에서 만난다.

- 동문 터에서 계곡 안쪽으로 가면 집수정과 건물 터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계단식 평지마다 주초석이 나뒹군다. 높이 2m가량 축대가 마치 성벽처럼 보인다. 터마다 주초석이 줄지어 있다. 가장 위쪽은 산성 안 지휘부로 짐작된다. 아래쪽에는 방형 집수정이 있고 물이 차 있다. 북쪽 계곡물을 모아두었던 것이다. 내부는 3∼4단 석축이다. 물이 스며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바로 옆 집터도 주초석 배열로 미뤄 꽤 큰집 같다. 산성 안에서 물은 가장 소중하다. 장기 농성도중 물이 떨어지면 패전은 불가피하다. 건물은 흔적이 없다. 그저 축대와 주초석 뿐이다. 그러나 조선조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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