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쪽 계단식 성벽

 

   
▲ 민가 담장으로 변해버린 성벽

 

   
▲ 북쪽 토성 유구

 

   
▲ 서남쪽 암벽위에서 바라본 황강

 

   
▲ 성벽 발굴 현장

 

   
▲ 옥전 고분군

 

   
▲ 장대 건물 터 추정지

 

   
▲ 토성 정상부 우물 터

 

   
▲ 황강나루터 느티나무

 경남 합천군 초계면과 쌍책면은 원삼국시대 진한 ‘초팔국’ 영역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합천 동부에 정치체제를 갖춘 가야 ‘다라국’이 나온다. 지금도 쌍책면 ‘다라리’가 있다. 이에 따라 고고학계는 ‘초팔국’보다 가야 ‘다라국’으로 비정한다.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 이사금 조‘는 ’초팔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초팔국‘은 신라 파사왕 29년(108년) 신라에 복속된다. 이때 지명이 초팔혜현이다. 통일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 팔계현으로 강양군(지금 합천군) 영현이 된다. 고려 태조23년(940년) 초계군이 된다. 현종 때 합주(오늘날 합천)에 속했다가 명종 때 감무를 둔다. 충숙왕 때 지군사로 승격한 뒤 조선말까지 ’군‘으로 존속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합천군에 통합된다. 그리고 일개 면 단위 작은 고을로 전락한다.

초계면은 지름 4km 거대한 원형 분지에 자리해 있다. 쌍책면은 서쪽에 황강이 굽이쳐 흐른다. 황강은 남북으로 해안지방 사천과 내륙산간지방 고령을 잇는다. 동서로 합천과 창녕을 잇는 교통요지다. 쌍책면은 옛 치소 초계면과 가깝다. 이곳 성산리에 부족국가 ‘초팔국’ 또는 ‘다라국’ 성곽 자취가 남아 있다. 고대 국가 치소였을 이 토성은 오랜 기간 ‘성산토성’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최근 발굴과 함께 ‘다라국성’으로 바뀌어 불린다. 이는 ‘다라리’란 마을이 존재하고 일본서기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임나일본부설로 날조된 것이라며 여전히 ‘초팔국’이라고 주장하는 축도 적지 않다. 이와 함께 성곽 또한 ‘초팔국성’ 또는 ‘초팔혜현성’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성산토성은 쌍책면 성산리 황강변에 있다. 성산리는 마을 서쪽을 황강이 감싸 안고 지나간다. 황강 물굽이가 만들어낸 높은 절벽은 마을을 외적으로부터 지켜주는 천혜의 방어망이다. 북쪽은 넓고 긴 폭의 인공 토성이 막고 있다. 이 토성에서 북쪽 산 넘어 고대 가야 옥전고분군이 있다. 토성 바깥으로 긴 농로가 나 있다. 동쪽은 고령방향 지방도 황강옥전로와 만난다. 황강옥전로를 북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합천박물관이 나온다. 고분군은 박물관 뒤 능선에 펼쳐져 있다. 체성은 전체적으로 정방형이다. 북쪽이외 남, 동, 서쪽이 성산리 마을이다. 성산리는 우리말로 ‘잿미’라고 한다. 성곽 고어는 ‘잣’ 또는 ‘잿’이다. 잿미는 ‘잿밑’ 준말로 ‘성 아래 마을’이란 뜻이다.

북쪽 체성은 전체적으로 토성이다. 석성 흔적이 거의 없다. 동서로 일직선을 이루며 높게 지나간다. 바깥에서 쳐다보면 7~8m 이상 높은 언덕처럼 보인다. 남쪽 성안 마을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그 아래 계단식 좁고 긴 밭이 있다. 성벽 아래 빈 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체성은 둘레 약 1.1km, 면적 약 7만㎡, 성벽높이 안쪽 2.5~3m, 바깥쪽 7.5~8m로 확인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토축은 약 538m로 확인됐다. 토성의 범위는 야산과 남쪽 계곡을 아우른다. 성곽의 특이점은 서남쪽을 황강을 해자로 삼고 강이 휘돌아 나가며 깎아낸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북쪽 체성 가운데 지점에 북문 터(추정)가 있다. 여기서 남쪽 농로를 향해 내려간다. 성문 터 위치는 사실 고증이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폭 2m가량 세멘트 포장길이 성 안으로 이어진다. 체성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북고남저 형이다. 북쪽은 높지 않은 평탄지다. 집이 없고 너른 공간이 많다. 북쪽 체성 안에 무덤 서너 기가 눈에 띈다. 주위로 대부분 과수원과 밭이 개간돼 있다. 과거 건물 터 또는 훈련장이었으리라 싶다. 북문 터에서 조금 내려가면 왼쪽에 농로가 있고 대숲이 있다. 숲 한가운데 대나무가 잘려지고 너른 길이 조성돼 있다. 최근 발굴현장 접근을 용이하기 위해서일까. 동쪽 고지대에 고목이 세 그루 서 있다. 나무 앞에 토성이 옛 초팔국 치소임을 알리는 비석이 누워 있다. 길을 따라 가보니 여기저기 발굴현장이 보인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가장 낮은 발굴현장에 닿으니 높이 1.8m 길이 15m 성벽이 보인다. 이러한 석축은 성곽 북, 동 방향에서 발견된다. 남쪽 성벽은 민가 뒤 채전 밭둑 역할을 하고 있다. 발굴 결과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벽은 장방형 성 돌을 잘 다듬어 비교적 촘촘하게 쌓았다. 장기간 흙속에 묻혀 있다 드러나 그런지 누런 흙빛이 배어 있다. 성 돌의 변이 뭉툭하지 않다. 날카로운 각이 서 있다. 신라나 백제와 구분되는 가야만의 독특한 축조방식이 읽혀진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주택가를 지나면 오른쪽에 쌍책면사무소가 있다. 성 안 행정기관은 대개 고대 국가 치소 터가 틀림없다. 면사무소 앞에 쌍책초등과 고목 느티나무가 보인다. 나무는 15세기 경 류법성 선생이 심었다고 한다. 이곳은 황강 나루터였으나 다리가 놓이고부터 인적이 드물다고 한다. 느티나무 뒤로 4m높이 콘크리트 제방이 있다. 제방위에 올라서니 합천에서 흘러내리는 황강이 보인다. 황강은 10여m절벽 아래를 흐른다. 절벽이 마을 서쪽을 막아주는 형국이다. 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한 것이다. 건너편 강변에 백사장이 보인다. 마을 쪽은 높은 암벽이다. 이 곳은 암벽위로 목책 흔적과 집터가 확인됐다고 한다. 공원이 조성된 황강 위 절벽에서 황강을 바라보니 절경이 따로 없다. 경관 좋은 위치에 멋진 정자 관수정과 황강정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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