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서쪽 성벽 밖에서 본 전경

 

   
▲ 동남쪽 성벽 밖에서 본 전경

 

   
▲ 동문 터 부근 체성 안쪽 전경

 

   
▲ 동문 터 추정지

 

   
▲ 북문 옹성밖 거대한 하단부 성 돌

 

   
▲ 북문 터 밖 옹성

 

   
▲ 북서쪽 성벽 안쪽 석축 계단

 

   
▲ 북서쪽 성벽위 전경

 

   
▲ 서북쪽 복원된 체성 밖 전경

 

   
▲ 북문 터 추정지

 경남 거제는 삼한시대 변진(弁辰) 12국 가운데 독로국(瀆盧國)으로 비정된다. 3세기 중엽 편찬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전(弁辰傳)에 등장하는 나라다. '왜(倭)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룬다'고 기록돼 있다. 변한의 최남단 소국이다. 그러나 독로국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거제도설, 부산 동래설, 다대포설 등으로 나눠져 있다. 거제의 옛 동헌 기성관(岐城館)보수 과정에 발견된 상량문은 독로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다. 거제 일대에는 빗살무늬토기, 돌칼 등과 패총,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물이 다량 분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지명은 상군(裳郡)이었다. 현 지명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처음 갖게된다. 이 시기 각 군사·행정 중심지마다 치소성을 쌓았다.

남부면 다대산성은 당시 대표적인 치소성이었다. 아래 마을 다대리는 통일신라 송변현이었다. 둔덕면 우두봉 정상 둔덕기성도 통일신라 성곽으로 확인됐다. 고려 의종 24년(1170년)‘무신의 난’으로 폐위된 의종이 3년간 이 산성에서 지냈다. 거제는 고려, 조선조 개성과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 길목이었다. 이 시기에는 왜구 방어용 축성이 해안가 위주로 활발해진다. 사등성, 오량성, 옥포진성, 지세포진성, 구영등성, 구조라성 등이다. 이후 임진왜란을 맞아 고대 성곽 수축 및 재수축, 신축, 이전 등이 활발해진다. 가배량진성, 구율포성, 옥산성 등이 대표적이다.

고대 남해안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지리적으로 섬이었던 거제가 약탈 대상이었을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이전 선사 또는 삼한시대 아무런 관방시설이 없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해소해줄 옛 독로국 치소 추정 성 터가 거제시 사등면 성내리에 있다. 너른 들판에 쌓아 평지성으로 분류되는 사등성(沙等城)이다. 사등면은 과거 오랜 기간 거제 서북부 중심 치소였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고을이다. 유적지가 많고 많은 유물이 발굴됐다. 거제도 최초 오량역사(驛舍)와 오량성, 청곡지석묘, 오량석조여래좌상 등이 손꼽힌다. 이로 미뤄 보면 사등면은 삼한 부족국가 시대 최초 치소로 짐작된다. 물론 사등성과 독로국 연관성을 보여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사등성은 조선 초기 축조 기록만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원년 5월이다. 이에 따르면 고려 원종 12년(1271년) 창궐하는 왜구를 피해 진주와 거창으로 피난을 떠났던 백성들이 조선 초 세종 4년(1422년) 되돌아온다. 이들은 섬 안 수월리에 임시 방어 목책을 세우고 거주한다. 이후 세종 8년 치소를 사등으로 옮겨 석성을 쌓는다. 이때 쌓은 성곽이 사등성이다. 이때 석성을 쌓는다. 하지만 사등 일대가 고대 치소였다. 그러므로 고대 토성이 이미 있지 않았나 싶다. 독로국을 사등 일대로 비정하면 얼마든지 추정가능하다. 사등성은 완성 후 세종 30년(1448년) 비좁고 식수가 부족해진다. 치소는 현 거제 중심지 고현으로 다시 이전한다. 이로써 현 석성 사등성을 1426~1448년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치소 이전 전까지 군사행정 중심지였던 것이다.

사등성은 통영에서 거제 방향 국도 제14호선 거제대로에 인접해 있다. 사등면소재지에서 거제시청 방향 3km 지점 오른쪽이다. 구조와 형태는 평지 석축성이다. 체성은 둘레 986m, 최대 높이 약 3.5m, 폭 최대 10m, 면적 64,342㎡로 확인됐다. 체성은 원형에 가까운 정사각형으로 성 안을 둘러싸는 형태다. 체성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동, 서, 남, 북문 터가 있다. 읍성 4대 문이다. 문 터 사이 중간지점에는 정방형 돌출된 치성도 보인다. 치성은 모두 5기로 확인된다. 북동쪽 체성 안쪽으로는 긴 계단식 3단 석축을 쌓았다. 이 방향은 체성 높이가 높다. 해안에 상륙하는 외적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엄폐된다. 그만큼 해안 방향 수비를 강화했던 것이다. 체성 주위로는 들판보다 20m 폭으로 낮게 해자(垓字)를 팠다. 체성에는 ‘산음(山陰)’, ‘삼가(三加)’, ‘상(裳)’등의 글자가 새겨진 성 돌이 보인다. 동원된 인력 출신지이다. 산음은 경남 산청의 옛 지명이고 삼가는 현 경남 합천군의 면단위 고을이다. 상(裳)은 거제의 옛 이름 상군에 따온 듯하다. 성 쌓기에 현지 인력도 동원된 것이다. 성 문 터에는 ㄱ자 또는 반원형 옹성이 있다. 옹성은 북문 터에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밖에서 성문을 에워싼 구조다. 북쪽 체성 밖에는 성안 물을 빠져나가도록 장방형 수구를 두었다. 동북쪽 체성 가운데 지점에 옛 성문은 아니지만 성 안으로 드나드는 출입로가 나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좌우로 계단식 석축이 보인다. 안쪽은 계단식 축대지만 체성 밖은 여전히 수직이다. 안팎으로 쌓아올린 협축식이다. 하지만 안쪽 성벽을 기존 성벽보다 낮은 높이로 더 두껍게 보강한 형식이다. 안쪽은 방어력과 성벽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하부에 계단을 만들었다. 여기다 체성 상단 일부를 ㄷ 자형으로 잘라내고 계단을 만들었다. 계단위에 올라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외부 시야를 확보한 것이다. 서문 터에도 반원형 옹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누군가 옹성과 함께 그물을 쳐 닭을 키우는 닭장으로 사용 중이었다. 접근이 불가해 발길을 돌렸다. 서문 터에서 남문 터를 거쳐 동쪽 성벽을 돌아가기 까지 모두 옛 모습 그대로 성벽이 잘 보존돼 있다. 하단 굵은 장방형 기단, 상단 그보다 작은 성 돌을 쌓아 올렸다. 전형적인 조선조 축성방식이 엿보인다. 이 구간 또한 외벽이 수직이다. 그러나 북동쪽과 달리 남쪽은 안쪽에 성 돌을 쌓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조 흔한 편축 내탁식이다. 이는 외벽은 성 돌을 쌓지만 안쪽은 그냥 흙으로 덮어버리는 방식이다. 공격은 어렵고 성 안 군사들의 방어는 쉽게 한 것이다. 동쪽에도 문 터와 체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형태가 완전하지 못해 어림짐작할 뿐이다. 동남쪽 현 사등교회 옆에는 아직 복원 안 된 체성이 있다. 성벽 위에 예비군 초소가 있다. 바깥으로 뻗어나간 사각형 치성이 체성에 붙어 있다. 성 돌은 손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다. 밖에서 본 치성은 장방형 다듬은 큰 성 돌이다. 성벽은 다듬은 성 돌로 쌓았지만 안쪽은 잡석으로 채운 것이다. 사등성은 현재 남, 서, 북쪽은 체성 복원과 함께 둘레 길을 만들어 놓았다. 따라 걷다보면 체성 밖과 안쪽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동남쪽 체성은 아직 복원이 안 돼 있다. 마을 안길을 따라 다니며 보면 드문드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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