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제주답게 한 ‘병와 이형상 선생’ 재조명도 활발

▲ 탐라순력도 표지, 비단 바탕에 금가루가 묻어 있어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 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 우로부터 허남춘 단장, 박규홍 소장, 이학용 부이사장, 이임괄 종회장

   
▲ 우로부터 박용범 학예과장, 박찬식 박물관장, 이임괄 종회장, 박규홍 소장, 허남춘 단장, 이학용 부이사장

   
▲ 별방조점이 있었던 별방진에서 우로부터 고영철 전 교장, 이학용 부이사장, 이임괄 종회장, 박규홍 소장

   
▲ 용연, 병담범주가 행해졌던 장소

   
▲ 한라장촉, 최고의 제주지도로 꼽힌다.

   
▲ 호연금서, 병와 선생이 제주를 떠나오는 장면을 담고 있다.

   
▲ 병담범주, 현재의 용연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 제주전최, 제주목 관아에 대한 상세한 그림이 담겨 있다.

   
▲ 병와 이형상 초상화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선생과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가교(架橋)로 제주도와 경북 영천시의 우정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영천에서는 박규홍 병와연구소장, 이임괄 병와공종회 종회장, 이학용 청권사 부이사장 등은 지난 17~19일 제주도를 방문했다.

제주에서는 허남춘 제주대학교 교수(제주역사문화기반구축 민관추진협력단장),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 박용범 제주민속자연사 학예과장, 강창언 제주도예촌 대표, 고영철 전 교장 등이 육지의 방문객들을 정중히 맞이했다.

이들의 만남은 국보 승격을 추진 중인 탐라순력도 연구와 병와 선생에 대한 재조명 사업을 제주와 영천이 공동으로 도모하는 차원이었다.

이들은 오는 6월 제3회 '병와 이형상 전국학술대회'를 개최해 성균관대학교, 제주대학교, 병와연구소의 학자들이 8편의 논문 등 다양한 분야를 발표하기로 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논문을 발표, 병와 이형상 선생의 학문적 가치가 새롭게 밝혀지고, 탐라순력도가 조만간 국보로 지정될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주>



“병와 선생은 1년 만에 어떻게 제주에 대한 방대한 기록물을 남겼을까요?” 이들은 모인 장소마다 병와 선생과 탐라순력도에 대한 여러 일화로 얘기꽃을 피웠다.

이들의 대화는 제주도의 타임라인을 320년 전으로 되돌렸다. 320년 전인 1702년 3월, 병와 선생이 제주목사로 부임한 후 제주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는 내용이다.

병와 선생은 재임했던 1년 동안 한라장촉(漢拏壯囑, 제주전도)을 포함한 탐라순력도 41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 백과사전인 남환박물, 공문서인 탐라장계초, 문집인 탐라록을 저술했다. 이 밖에도 날인에 사용했던 각종 인장, 한라산 고사목으로 만든 병와금(거문고), 각종 간찰(簡札,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제주도는 5만 년 전 화산대폭발로 형성됐다고 한다. 이후 선사시대, 고대, 중세로 이어오면서 상당한 자치권을 가졌던 탐라국(耽羅國)이 조선 초기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현재의 제주목관아 자리가 탐라국 도성이었다.

그러나 탐라국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문인들이 문집으로 기록을 남겨 당시의 역사와 문물들을 엿볼 따름이었다.

◇도민들 탐라순력도의 국보 승격 고대

현대어로 번역돼 출간된 탐라순력도(영인본)는 제주지역에서 발행된 단행본으로서는 최대의 부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추가 인쇄가 충분히 예상되며, 각종 파생 인쇄물은 물론 디지털 영상들도 봇물이다.

‘탐라순력도가 있어서 제주가 더욱 제주답다’라는 말이 흘러가는 얘기가 아니었다. 제주는 탐라순력도에 근거해 최대 숙원 사업이었던 제주목관아 복원을 완성했다. 복원된 제주목관아는 육지의 여러 지역에서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국의 관아들이 대부분 훼철됐고, 주변의 지형지물조차 크게 변한 마당에 320년 전 관아 건축물의 모양과 위치와 명칭이 고스란히 담긴 상세한 도면은 전국에서 제주가 유일하다고 한다.

탐라순력도는 병와 선생이 1702~1703년 제주목사로 재직 시 화공 김남길(金南吉)에게 주문해 그린 화첩이다. 서문 2면과 그림 41면으로 구성돼 있다. 그림들은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 실시한 순력(巡歷)과 1702~1703년에 시행된 도내의 행사 장면을 기록했다.

화첩의 크기는 가로 36.4㎝ 세로 56.9㎝이다. 표지가 비단 바탕에 금가루를 입혀 제작됐고, 모두 43면의 화려한 채색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어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화면 상단에는 4자의 제목이 적혀 있고 중간에 그림이 있으며 하단에는 물산(物産)과 행사에 대한 설명이 기록돼 있다. 탐라순력도는 영천의 병와유고에서 300년 가까이 보존돼 오다 1998년부터 제주시에서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탐라순력도는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官衙) 건물, 군사 시설, 지형, 목장, 풍물 등이 자세하게 기록된 사료다. 실증적인 지리 정보와 제주의 군사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제주도 역사, 풍속, 전통 연구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제주도는 지난 2019년 11월 보물 제652호 중 하나였던 탐라순력도에 대해 최초로 국보 승격 심사를 신청하고, 12월에 탐라순력도 고화질 이미지를 전격 공개한 바 있다. 제주도가 탐라순력도와 더불어 이를 제작해 보존한 당시 제주목사 병와 선생 연구를 상당히 진척시킨 것도 확인됐다.

하지만 탐라순력도 문화재청에서 국보 승격이 부결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제주도민들은 문화재청이 조속한 시일에 탐라순력도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국보 문화재로 인정받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실학의 선구자였던 병와 이형상 선생

병와 선생은 제주목사 겸 제주진 병마수군절제사 지위를 제수받아 1702년 3월에 제주에 부임, 1703년 5월 제주를 떠났다. 따라서 탐라순력도는 부임 기간인 12개월 동안 제작된 것으로 화공 김남길이 순력과 각종 행사에 참여해 주요 지리 정보와 행사 장면을 스케치해 두었다가 후에 화첩을 완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효령대군 10대손인 병와 선생은 1677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관료이자 학자다. 은퇴 후 영천의 호연정에 머물면서 저술 활동에 집중해 188종 4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남겼다. 그중 중요한 수고본 저작이 추려져 보물 652호로 지정됐다. ‘수고본(手稿本)’은 손으로 직접 쓴 책을 말한다.

탐라순력도 외 보물 제652호는 선후천(先後天), 악학편고(樂學便考), 악학습령(樂學拾零), 강도지(江都誌),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둔서록(遯筮錄), 복부유목(覆類目), 정안여분(靜安餘墳), 동이산략(東耳刪略)이다.

현재 영천시 호연정에 거주하는 병와 10대손 이임괄 병와공종회 종회장이 보물과 병와금, 인장류, 판목류, 지휘검 등을 소중히 관리하고 있다. 나머지 병와유고 상당수 책자는 성균관이 소장하고 있다.

병와유고는 성리학 분야뿐 아니라 지리학, 역사학, 역학, 예약, 시문 등의 영역을 고루 포괄하고 있어 조선 후기 국학(國學) 연구에 큰 의의가 있다. 아울러 17세기 말 18세기 초 지식인 문사의 학문에 대한 실증적 사료로서 초기 실학의 정수가 담긴 책으로 평가된다.

대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부친이 병와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아버지를 따라 와 병와 선생을 만난 적이 있는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병와 선생을 실학의 선구자로 표현했다.

병와유고 중 제주도와 관련된 것은 12종 서책과 백여 편의 간찰과 병와금(病窩琴, 국가민속문화재 제119호) 등이 있다. 탐라순력도는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은 ‘남환박물’, ‘탐라장계초’(耽羅狀啓秒), 탐라록을 추가로 확보해 ‘병와 이형상 관련자료’란 명칭으로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했다. 또한 150여 편의 이형상 간찰도 소장 중이다.

◇마음은 제주에 두고 육지로 왔다

320년 전, 1703년 초봄, 병와 선생은 부임 1주년 만에 청천벽력 같은 문서를 받았다. 조선 조정에서 보낸 파면 문서였다. 당시 제주는 육지와 뱃길이 전면적으로 끊겨 있었기에 병와 선생은 문서를 받고도 배편이 마련될 때까지 얼마간을 기다리다 육지로 떠났다.

숙종(肅宗, 조선 제19대 왕, 재위 1674∼1720년)은 병와 선생에 대한 사간들의 여러 차례 탄핵에도 애써 거절해왔다. 탄핵 사유는 병와 선생이 제주목사로서 유배자를 보살폈다는 것이었다.

결국 실록에는 왕의 탄핵 윤허(允許)에 정작 아무런 사유를 달지 않아 숙종이 어쩔 수 없이 선생을 파면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그 유배자는 다름 아닌 오시복 전 이조판서였다. 오시복(1637~1716)은 병와 선생보다 17년 앞선 인물로 남인에 속했다. 그는 숙종 시기에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 호조판서(현 경제부총리), 이조판서(현 행안부장관)를 지냈다. 병와 선생은 그에게 정책의 자문을 구했고, 물심양면으로 그와 교류했다. 탐라순력도의 제작도 '이토록 장엄한 광경을 화폭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라는 권유가 있었다고 오시복 간찰에 나와 있다.

이들은 간찰을 없애기로 하고 서로 주고받았다. 오시복은 간찰이 발각되면, 이 목사에게 화가 미칠까 봐 모두 폐기했다. 하지만 병와 선생은 그것들을 없애지 않았고 일체 감췄다. 이에 3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보존됐고, 제주도는 그것들을 모아 번역, 편찬 사업을 펼쳐 당시 상황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최근 오시복이 병와 선생에게 보낸 간찰이 수집되면서 탐라순력도가 제작된 경위와 숨겨진 이야기들 상당수가 속속 드러났던 것이다.

이에 병와 선생이 제주 관련 기록물을 제작,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천에 돌아온 병와 선생은 제주 관련 서적을 상세하게 완성했다. 선생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모든 기록물을 빠짐없이 보존해 오늘에 전하도록 했다.

병와 선생은 탄핵당해 육지로 가는 배에 오르면서도 마음만은 제주도에 남겨뒀다. 탐라순력도 호연금서(浩然琴書)에는 병와 선생이 보길도를 돌아 나오면서 드높이 솟은 한라산의 모습을 보며 제주도와 제주도민을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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