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남대영(루이 델랑드, Louis Deslandes, 1895.6.13.~1972.11.17.) 신부는 누구보다 포항을 사랑했다. 그는 한평생 먼 이국에서 포항인을 위한 사랑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 감사의 삶을 살았다. 그는 죽어서도 고국 프랑스로 가지 않았고, 포항 땅에 뼈를 묻었다.

올해는 남대영 신부가 조선에 첫발을 디딘 지 100년, 선종(善終)한 지 51년째 되는 해이다. 성서에 나오는 희년(禧年, Year of Jubilee)을 두 번 맞이한 연수다.

그의 연보를 살펴보면, 그의 인생 여정이 하늘이 대한민국과 포항에 기쁨(희년)을 베풀어 준 해와 일치했다. 남 신부가 미션을 수행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고, 공산군을 물리쳤다. 국가가 이처럼 고단하고 분주했던 시절, 남 신부는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가장 낮은 곳에 스스로 몸을 내던졌다.

남 신부가 포항 송정해변에서 전쟁고아, 한센환자, 장애인, 성매매 여성 돌봄을 시작한 때는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2년 3월 15일이었다. 그가 송정해변을 미션의 전진기지로 삼은 이유가 2차세계대전 때 사상 최대의 연합군 상륙작전이 펼쳐졌던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과 포항 송도해변이 판박이로 빼닮아서 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송정해변은 현재 포항제철이 우뚝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남 신부는 1970년대 초 포항제철에 이 자리를 내줬다. 송정 해변을 중심으로 그때 세워진 포항제철은 포항시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대한민국 산업화 현대화의 발판을 거뜬히 깔아냈다.

포항 송정을 떠난 얼마 후인 1972년 11월 17일, 그는 포항시 오천읍 갈평리 제2의성모자애원에서 새벽 강론을 준비하던 중 향년 77세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섬겼던 천주의 곁으로 올라갔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포항 땅에 묻혀 천국에서도 한국인과 포항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 온 푸른 눈의 이방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6월 어느 날, 푸른 눈의 한 이방인이 대한해협 거친 파도를 넘어 부산항에 도착했다.

루이 델랑드(Louis Deslandes), 후일 ‘남대영’으로 불린 프랑스 노르망디 빠리니 출신의 28세 젊은 가톨릭 신부는 1923년 가장 낮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국의 삶을 뒤로하고 식민지 조선에 두 발을 내디뎠다.

1935년 겨울, 남 신부는 경북 영천의 한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훗날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가 되는 ‘삼덕당(三德堂)’이라는 이름의 작은 초가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그는 병든 노인과 고아를 데려다 함께 생활하며, 가장 낮고 천하게 여겨진 사람들을 위한 한국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때는 서슬 퍼랬던 일제 강점기, 남 신부는 일체의 안락한 삶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고 조선이라는 국호마저 빼앗기고도 여전히 경멸적인 조센징(조선인)이라 불린 사람들 곁에 한결같이 머물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그에게 탄압과 감금(1941-1945)을 해 조선에서 추방하려 했으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상당수의 서양 선교사들이 그때 조선을 떠났던 것과 비교하면, 목숨의 위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그는 조선인에게 교회 운영을 맡기며 ‘교회의 주인은 신부가 아니라 조선인이며, 조선의 주인 또한 조선인’이라는 점을 부단히 일깨워 주고자 했다.

1945년 8월 15일 맞이한 광복의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는 조선에 대해 마지막 수탈을 감행했고, 조선의 등골까지 쏙 빼내 도망가 버렸다.

◇참혹한 전쟁 중 화사함 피워낸 '희생화'

그 결과 갓 출범한 대한민국은 지독한 가난과의 난리가 시작됐다. 난리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진짜 전쟁이 발발했다.

그가 수녀원을 포항 송정리로 옮긴 때는 500만명의 희생자를 낸 한국전쟁의 광풍이 한반도를 덮친 후였다.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겨났고, 살을 뜯어내고 뼈까지 추려내는 기아와 궁핍은 극심해졌다. 욥에게 미쳤던 연속적인 고난에 비견될 만큼 대한민국에 이어진 고난에도 남 신부는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고난을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기회로 여긴 듯 전쟁 고아들을 거둘 보육원을 짓고, 버려진 노인을 위한 양로원을 세웠다.

그는 어느날 실오라기 하나 없이 움막에서 지내는 한센환자를 목격했다. 이 광경을 그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보여준 ‘계시’로 인식했다. 그는 즉시 한센환자 정착촌을 마련했고, 걸식하며 떠도는 이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와 진료소를 개설했다.

소외된 자들의 요람이었던 이 수녀원은 포항시 대잠동으로 이주하기 전 동양 최대 규모의 시설이었다고하니, 역설적으로 한국인 입장에서는 ‘매우 비참하고 부끄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난 후 닥쳐온 궁핍과 병마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남 신부의 수녀원은 1958년 무료급식소와 진료소를 개설했다.

남대영 신부의 이 같은 ‘성자행’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8월 15일 문화 훈장을, 프랑스 정부는 1969년 11월 3일 레지옹 도뇌르(Legion d' Honneur) 최고 훈장을 헌정했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 경제 부흥을 위한 포항제철소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영일만 일대 부지 내 많은 시설이 옮겨가게 됐다. 이 중에는 수십 년간 가장 낮은 곳에서 남 신부가 미션을 펼쳤던 예수성심시녀회의 수녀원, 고아원, 양로원이 있었다. 당시 전쟁고아, 한센환자, 장애인 등 800여 명의 대가족들은 황무지 모래펄에 정성으로 가꾼 20년 보금자리를 눈물을 훔치며 떠났다.

이들은 포항제철 설립이 가져올 국가의 산업화, 현대화의 미래를 머리에 그려보며 기꺼운 마음을 다져 먹었다.

◇포항제철에 자리 내주고 포항을 빛낸 인물

박태준 포항제철 초대 회장은 자서전에서 “남대영 신부는 출생지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과 유사한 이곳 포항의 해변에서 이 땅에 전쟁으로 가장 험난하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보살핌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족이 되어 주었으며, 또한 20여 년간 이루어 놓은 송정 평화의 계곡에 정부로부터 철강국책사업 부지로 선정되었을 때, 8백여명의 대식구를 이끌고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 척박한 대잠언덕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오늘에 포항의 발전에 기틀을 놓았다”라고 회고했다.

남대영 신부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선교사로 못다한 사랑을 다하기 위하여 이곳 포항 대잠 언덕에 잠들어 계시다.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 떠나갔지만, 그의 숭고한 사랑의 정신은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들에게 계승되어 오늘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감사의 삶을 몸소 실천하시고 그 정신을 후대에 길이 남기신 신부님의 정신은 감사운동을 통해 인성교육도시로서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있는 포항시정의 방향성의 근원이 됨을 상기하고자 한다”라는 평가 하에 남 신부를 ‘포항을 빛낸 인물’로 추천했다.

남대영 신부가 떠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사랑과 헌신과 희생의 아름다움은 한국인과 포항인의 가슴속에 끊임없는 감동으로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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