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 터에서 바라본 남쪽 성벽

   
▲ 남문 터에서 바라본 남쪽 복원 체성 위 모습

   
▲ 남동쪽 복원 성벽 원경

   
▲ 성밖에서 바라본 남문 터

   
▲ 성안에서 본 남문 터

   
▲ 성문 기둥 오른쪽 돌쩌귀

   
▲ 성안에서 본 남문 터

   
▲ 성안 훈련장 터 남쪽 곡선부 성벽

   
▲ 동쪽 무너지기 직전 성벽

   
▲ 동쪽에서 바라본 복원 남쪽 체성

 경남 합천군 야로면은 가야산 남쪽 해인사 길목이다. 동쪽으로 경북 고령군, 서쪽으로 거창군 가조면을 두고 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동, 서로 거창과 현풍을 잇는다. 남, 북으로 합천과 성주, 금산을 잇는 사통팔달 교통 요지다. 신라 시대 또는 그 이전 가야시대 지명은 적화현으로 비정된다. 삼국통일 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야로현으로 고치고 이웃 고령군의 영현으로 삼는다. 고려 현종 때 합천군으로 이속시킨다. 조선시대 합천군 현내면이었다가 1914년 상북면과 하북면을 합쳐 야로면이 돼 지금에 이른다.

신라 이래 지금까지 유지해온 지명 ‘야로’에는 ‘철광석을 녹여 쇠를 뽑아 두드리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고대 야로 인근에서는 철광석이 대량 생산됐다. 인근에는 제철 유적지가 많다. 생산된 철은 농기구와 무기를 제작하는 한편 이웃국가에 수출했다. 화려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가야 시대 고분군도 상당수 있다. 이로 미뤄 야로가 당대 합천의 중심 고을임을 비정해볼 수 있다. 풍부한 철은 대가야를 ‘철의 왕국’으로 성장시킨 기반이 된다.

야로면소재지 북쪽 하빈2리(웃터마을)뒤 해발 755m 미숭산이 있다. 대가야읍 고분군에서 능선을 따라오면 닿는다. 미숭산은 주산과 함께 대가야 진산이다.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두 산 가운데 고도는 미숭산이 더 높다. 고령군 최고봉은 미숭산이다. 이 산 본명은 상원산이었다. 여말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일으킨다. 고려 장군 이미숭은 뜻있는 군사를 모아 항전을 결의한다. 그는 논산 노성산 김천 덕대산 성주 독용산성, 운라산성 등을 전전하며 전투를 벌인다. 후퇴를 거듭하다 마침내 이곳 상원산에 진을 진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패배의 쓴잔을 마신다. 그는 산성 안 절벽아래몸을 던진다. 상원산은 이 무렵 미숭산으로 불린다.
이 산 정상에 고대 산성이 있다. 바로 미숭산성이다. 체성은 둘레 1.3km에 이른다. 형태는 남문 기준 역삼각형이다. 8부 능선을 따라 남쪽 계곡을 안고 있다. 포곡식 산성이다. 완만한 남쪽은 합천군에 속한다. 북쪽은 고령군과 경계를 이룬다. 지금도 고대 방어시설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긴 세월에 무너졌지만 터는 대개 남아 있다. 성문은 동, 서, 남문 세 방향이다. 남문은 복원됐으나 동, 서문은 위치만 비정된다. 서문 옆에는 암문 또는 북문이었을 ‘소서문’ 터가 있다. 산정에는 봉수대를 갖추었다. 남쪽은 사당 터로 전해진다. 이미숭 장군 흉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망루 터는 체성 동, 서 양끝 지점 고지대 두 곳에 있다. 동문과 남문은 성루로 망루를 대신한 듯하다. 서문은 좌우 두 망루가 이를 대신한 듯하다. 결국 미숭산성은 망루도 네 곳, 성문도 네 곳인 셈이다. 산성 안에는 샘물 6개소와 연못 1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진다.


산성에는 1960년대 갑옷과 활, 창 고려자기 등이 발굴된 갑검릉, 군사들이 송악(현 개성)을 향해 충절을 다짐했다는 망향대, 활과 화살을 보관한 장궁구, 군사들이 훈련을 했다는 연병장, 장군이 몸을 던져 순절했다는 순사암, 명령권이 없다며 군대 해산을 명령한 장소 아액금대, 활 터 궁사대, 망향대와 갑검릉 사이 말 타고 달렸다는 주마대, 장군이 활을 쏘자 월광사지 삼층석탑에 ‘달각’ 하며 소리가 났다는 달각 바위 등 유적이 즐비하다. 순사암 북쪽에 여주이공미숭자정지지(麗州李公美崇自靖之地)’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최근에는 맷돌이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답사는 대구∼광주고속도로 해인사I.C에서 해인사방향으로 가다가 우측 하빈2리(웃터마을)가 초입이다. 안내판이 마을 뒤 합천종합야영수련원 본관 서쪽에 있다. 산길은 지그재그로 고도를 높여간다. 가끔 왼쪽 낭떠러지를 주의해야 한다. 그만큼 천혜의 요새다. 이윽고 600여m 능선에 한 그루 고목과 함께 남문이 보인다. 남문은 좌우로 성벽을 거느리고 있다. 체성은 장방형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문터는 안팎 조금 가파르다. 사다리를 내걸었다가 적 침입 시 걷어 올리는 현문처럼 보인다. 바닥이 가파르지 않아 현문은 아닐 것이다. 성문 좌우로 두 기 돌쩌귀 유구가 있다. 성문 개폐 시 ‘삐이걱’ 소리가 여기서 난다. 판문 기둥이 꽂혀 있었던 흔적이다. 산성 안은 계단식 평탄지가 조성돼 있다. 가운데 식수원이었을 돌우물(영천)이 있다. 그 뒤 너른 평탄지는 군주둔지로 판단된다.

남쪽 체성은 남문 터에서 동, 서로 뻗어나간다. 체성은 산위로 이어질 무렵 거대한 바위와 만난다. 그 뒤에 산을 깎아 성 돌을 채운 성벽이 100여m 이어진다. 이러한 형태는 가야시대 전형적인 내탁식 쌓기다. 성벽은 여기서 곧 끝난다. 체성은 무너진 채 이어진다. 낭떠러지 아래 굴러 내린 성 돌이 쌓여 있다. 이어 궁사대, 동문 터다. 성곽 체성 가운데 가장 오른쪽 돌출 지점이다. 동쪽 대가야읍 주산과 이어진다. 동문 터를 지나면 망향대다. 여기서 북쪽 체성은 서북쪽으로 이어진다. 성벽은 간 곳 없다. 바닥에 깔린 성 돌만 체성 윤곽을 짐작케 해준다. 오른쪽은 절벽으로 산세가 가파르다. 체성을 지나면 곧 정상이다. 가야산과 매화산, 우두산, 오도산 등이 조망된다. 이어 서쪽으로 소서문 터, 다시 남쪽으로 서문 터, 순사암 등을 연이어 만난다. 순사암 아래 연병장 터가 있다. 터를 넓히기 위해서였는지 바로 앞 성벽이 불룩하다. 다시 남문 터가 눈앞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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