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서쪽 호미곶방향 해안

 

   
▲ 마을에서 바라본 북서쪽 포이포진성

 

   
▲ 담장이 된 성벽

 

   
▲ 대나무숲 체성 기단석

 

   
▲ 모포항에서 바라본 포이포진성

 

   
▲ 문 터 잔존 기단석

 

   
▲ 성문 터 안쪽 건물 터 축대

 

   
▲ 진성 안 성벽 유구

 

   
▲ 진성안에서 바라본 문 터

 

   
▲ 체성 해안가 제당 터

 조선 초기 경북 동해안은 방어체계상 경상좌수영 관할이었다. 서쪽 우수영과 경계인 낙동강에서 남해안과 동해안을 거쳐 현 영덕군까지다. 큰 고을은 부산, 울산, 경주, 영일, 영덕이 포함된다. 해안 방어가 주요 임무였다. 편제는 동래현 부산포에 본영, 총 11개 진(염포, 해운포, 다대포, 두모포, 개운포, 서생포, 감포, 포이포, 통양포, 오포, 축산포)을 관리했다. 조선 세조 때 ‘진관체제’가 확립된다. 행정단위 ‘읍(邑)’을 군사조직 ‘진(鎭)’으로 편성, 수령이 군사 지휘권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도는 왜구 방어를 위해 일부 관포를 재배치한다. 울산 염포가 부산포, 영일현 통양포가 북쪽 칠포로 옮긴다. 경상좌수영도 울산 개운포로 잠시 이전한다. 중종 이후 예하 관포는 또 조정된다. 삼포왜란 등이 발생한 시기다. 이때 예하 진은 10개(부산포, 다대포, 두모포, 개운포, 서생포, 포이포, 칠포, 서평포, 감포, 축산포)로 조정된다. 그러나 임란 이후 원거리 동해안 수군진은 모두 부산포로 집결하게 된다. 부산 연근해 집중 방어를 위한 조치였다.

경북 포항 장기면은 우리나라 동남부다. 지금은 면이지만 신라시대 남쪽 경주 감포, 북쪽 호미곶까지 관할하는 현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16년(757년) 기립현으로 의창군 영현이 된다. 고려 태조23년(940년) 장기현으로 개명한 뒤 현종 9년(1018년) 경주부에 내속된다. 여말 동예 해적과 왜구가 들끓자 장기현에 읍성을 쌓는다. 공양왕2년(1390년) 감무를 파견하고 조선 태종15년 군 지휘권을 가진 지현사를 둔다. 장기현이 군사 요충지임을 고려한 것이다. 세종21년(1439년) 9월 동지중추원사 이사검이 조정에 비변책을 올린다. 동해안에 수군진을 설치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 장기현 포이포(包伊浦: 현 장기면 모포리)에 수군진을 설치한다.

포이포 수군진은 ‘승정원 일기’ 등에 전해진다. 군사적 요충지이고 지휘관의 임명과 하직, 업무소홀 등에 대한 징계 등이 담겨 있다. ‘세종실록지리’에는 ‘병선 8척 군사 589명을 두었다’고 전한다. 1746년 발간된 ‘속대전’에는 ‘병선 1척과 사후선(첩보선) 2척’, ‘여지도서’에는 ‘거북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됐다’고 전한다. 또 임진왜란 직전 일본 첩자 염탐 보고에도 나타난다. 선조 25년께 일본 측이 작성한 보고서 내용은 ‘포이포진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장졸 217명, 군량미 532석, 동래에서 수로 270리, 육로 305리’ 등이다. 이는 조선 침략을 앞두고 사전 치밀한 준비를 짐작케 한다. 아울러 포이포가 군사 방어 요충지임을 보여준다. 포이포진은 영암3리에 군선 정박지(수영)를 두었다. 이 마을은 아직도 ‘수영포’로 불린다. 또 가까이 해안 감제초소를 두었다. 그 터는 ‘큰 초소 터’란 뜻 ‘대초밭’으로 불린다.

포이포진은 임란이후 해체된다. 효종9년(1658년) 부산 동래 남촌(현 부산 수영구 민락동)으로 옮긴다. 이와 함께 두모포영, 개운포영이 옮겨가고 감포영, 축산포영, 칠포영 등은 혁파된다. 임란 패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전략적 대비 차원이었다. 수군을 한 곳으로 집결시켜 전투력을 강화한 것이다. 이후 부산은 한말까지 최대 수군기지가 된다. 동래로 옮긴 포이포진은 종4품 수군만호가 수장이었다. 예하에 군관 18명, 진리 10명, 지인 9명, 사령 2명을 두었다.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전선 수군은 1,100명으로 꽤 큰 부대였다. 동래 이전 직전 장기현의 포이포진성 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다. 포이포진성이 있던 마을이 ‘포이포’다. ‘포이’는 ‘보리’의 이두식 표기다. ‘보리가 익는 항구’란 뜻이다. 한문으로는 모포(牟浦)다. 장기면 모포리에는 지금도 보리밭이 많다. 그런데 포이포진이 옮겨간 동래현 남촌면에 ‘포이포리’가 또 생긴다. 보리밭도 없고 보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전해온 수군진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초기 포이포진성은 지금도 장기면 모포리 해안에 자취가 남아 있다. 오랫동안 주둔해온 해병 해안방어 진지 덕분이다. 지금은 개방돼 민간인 출입이 자유롭다. 동해안 둘레길 해파랑길이 지난다. 모포항 방파제 북쪽 바위언덕이 다. 터는 그 위 평지다. 남서쪽은 바다를 메워만든 모포항을 감싸 안고 있다. 과거 바닷물이 현 마을 앞까지 찰랑거렸다. 모포리는 해안도로 건너 북쪽 뇌성산이 내려다본다. 산위에 뇌성산성이 있고 봉수대가 있다. 성 터는 뇌성산 왼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에 해당한다.

진성은 모포항 방파제 앞 주차장 출발 또는 도로변 구포휴게소 앞에서 해안 쪽 산길을 택하면 닿는다. 그중 모포항 주차장에서 바위언덕위 데크를 타고 오르면 손쉽다. 지대 높은 진성 터에서는 북쪽으로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멀리 장길리복합낚시공원도 보인다. 진성 터는 건물이 서 너 채 자리할 정도다. 북쪽을 향해 똑바로 바라보면 왼쪽 언덕아래 옹기종기 집들이다. 마을과 진성 터는 대나무숲이 갈라놓고 있다. 오른쪽은 곡선을 그리는 해안 절벽이다. 그러고 보니 동, 서, 남 세 방향 감제가 가능한 위치다. 바위언덕 가까이 텅 빈 해병 초소가 있다. 위쪽에 해안을 감시하는 첨단레이더 시설이 있다. 그 뒤로 옛 진성 건물 터로 추정되는 채전이 펼쳐진다. 가장 큰 건물 터는 남서쪽 경사지에 잘 다듬은 장방형 돌 축대를 쌓았다.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축대는 건물 바닥 기초와 평형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 아래가 드나들던 성문 터로 추정된다.

여기서 북쪽으로 대나무숲이 이어진다. 자세히 보니 화살을 만드는 시누대다. 고대 관방시설마다 주변에 시누대가 무성하다. 대나무숲은 구릉을 형성하며 산길을 맞물고 있다. 그 옆을 따라가니 토석혼축 체성이 띈다. 체성은 인공 축성 흔적이 역력하다. 진성 터 북서쪽을 감싸 안은 체성이다. 산길은 군용차량이 다니던 길이었다. 지금도 자동차 한 대가 너끈히 다닐만하다. 끝 지점은 구룡포와 울산 간 해안도로다. 도로를 건너면 뇌성산성 등산로 입구다. 도로변에서 발걸음을 되돌린다. 이번에는 진성 터 중간지점에서 서쪽으로 대숲을 헤치고 마을로 들어간다. 길은 양쪽에 쌓은 큰 돌 사이를 빠져나간다. 이는 성문 축성 흔적이다. 마을에서 이 곳을 통해 드나들었던 것이다. 성문 터가 틀림없다. 골목을 내려오니 바다와 닿은 고목이 자라는 곳에 옛 우물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마 성 안 군사들이 길어다 마셨을 식수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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