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쪽 성벽과 남문 터

   
▲ 동쪽 성벽에서 바라본 금마면 일대

   
▲ 북쪽 성벽

   
▲ 서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쪽 토성과 금마면

   
▲ 서북쪽 토축위에서 바라본 남쪽 성벽

   
▲ 서북쪽 성벽 발굴현장

   
▲ 남쪽 성벽 하단부 석축

   
▲ 성벽 발굴지

   
▲ 집수정

   
▲ 토성안 우물 터

  전북 익산시 금마면은 마한시대 부족국가 건마국으로 비정된다. 또는 목지국의 도성이었다고도 한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 때 백제에 복속된다. 백제 지명은 금마저(金馬渚)였다. 백제는 554년 신라와 관산성(오늘날 옥천) 전투를 치른다. 이 싸움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군 복병에 의해 전사한다. 이후 국력은 쇠퇴해지고 왕권은 약화된다. 600년 백제는 금마저 태생으로 알려진 무왕이 등극한다. 무왕은 패색이 짙은 도성 사비 대신 금마저 천도를 꿈꾼다. 따로 왕성을 짓고 정실왕후 사택씨(沙宅氏) 집안 후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한다.

그러나 백제는 삼국통일전쟁으로 660년 나, 당연합군에 정복된다. 금마저는 신라영역이 된다. 그로부터 8년 뒤 고구려도 멸망한다. 신라가 삼국의 패권을 걸머졌다고는 하지만 패망국 백제, 고구려는 왕족과 유민 중심으로 끈질긴 부흥운동을 벌인다. 670년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이 갑자기 신라에 투항한다. 고구려 부흥운동에 앞장선 검모잠에 의해 왕으로까지 추대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검모잠을 죽이고 망명의 길을 택한 것이다.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봉한다. 그리고 유민들과 함께 금마저에 살게 한다. 그는 684년까지 금마저를 다스린다. 금마저는 통일신라 35대 경덕왕 때 금마군이 된다. 고려시대에는 금마군, 익주(1344)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태종13년(1413년) 익산군이 된다. 금마저는 오늘날 금마면으로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익산의 뿌리이며 2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 왕도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름뿐 쇠락한 ‘면’ 단위 고을로 전락해 있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용순리 해발 125m 오금산에 작은 토성이 있다. 옛 ‘금마저’ 도성으로 전해지는 ‘익산토성’이다. 고구려 왕족 안승이 14년간 다스리던 보덕국의 치소로도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토성을 ‘보덕성이며 군1리 서쪽에 있다’ 기록했다. 왕궁리유적과 2.5km가량 떨어져 있다. 만경강 방어와 낭산, 삼기, 함열 방면 통로를 방어한다. 또 산이름을 따 ‘오금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익산토성은 1984∼85년, 2016∼18년 두 차례 발굴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둘레 690m 규모의 토축성으로 드러났다. 토성인줄 알았으나 남쪽과 서쪽 하단에서 석축이 추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동, 북쪽 체성은 지금도 발굴이 한창이다. 이 구간도 하단 석축이 발굴될 것이다. 산성 정상부 여러 지점에서 굴립주 건물(기둥을 세우거나 박아 넣어 세운 건물) 터와 우물터가 확인됐다. 유물은 다양한 백제 토기가 발굴됐다. 특히 북사(北舍)라고 새겨진 토기 조각과 ‘수부(首府)’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북사’ 기와는 백제 도성 부여 관북리에서도 발굴됐다. ‘수부’ 기와 또한 익산이 한때 도성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형태는 산 정상부와 남쪽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다. 정상은 오금산 두 봉우리를 휘감는다. 아래로는 남쪽 계곡을 껴안고 있다. 형태 분류는 테뫼식과 포곡식을 아우른다. 사면이 가파르지만 남쪽은 계곡이다. 남쪽 성벽은 지대가 낮고 석축이 드러나 있다. 하단 석축 성벽위에 또 다시 토축을 덮어 쌓았던 것이다. 남쪽 성벽 석축 높이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다. 일정규격 장방형 성 돌을 다듬어 가지런히 쌓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벽돌을 쌓은 듯하다. 남쪽 석축은 고구려 축성양식이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육합 쌓기’다. 장방형 성돌 1개를 6개의 성 돌이 에워싼 형태다. 단단하게 쌓기 위한 고구려만의 독특한 축성방식이다. 그런데 성 돌 1개를 6개가 아닌 7개로 에워싸기도 했다. 얼핏 보면 육합 쌓기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칠합 쌓기도 많다. 보덕국 고구려유민이 쌓을 당시 전문적인 축성기술자가 없었던 것일까? 석축은 지금까지 남쪽과 서쪽 이외 구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진입로는 지대가 낮은 남쪽이다. 왼쪽으로 꺾어 서쪽 20여m 언덕위에 남문 터가 있다. 정남쪽에서 서쪽으로 비켜나 있는 셈이다. 옹성 개념을 도입 한 듯하다. 남쪽 성벽을 타고 서쪽으로 가다가 서북쪽 각대 지점에서 북쪽으로 진입한다. 남문 터 안 서북쪽 고지대에 새로 전망대가 서 있다. 남쪽 성벽은 동쪽으로 뱀처럼 길게 뻗쳐 있다. 위에서 보면 석축은 안보이고 토축만 보인다. 토축 위가 그대로 회곽도이다. 바깥은 70∼80도 급경사지다. 다른 방향에 비해 비교적 낮은 지대이지만 밖에서 공격하는 외적이 오르기는 만만찮아 보인다. 동남쪽으로 금마저 시가지오 너른 익산 평야가 펼쳐진다. 남쪽으로 가까이 마룡지와 왕궁리유적, 백제 무왕부부의 능으로 알려진 쌍릉(대릉, 소릉)이 보인다.

서쪽 성벽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산 능선을 따른다. 중간 지점에 서문 터가 있고 언덕배기에 작은 우물터가 있다. 우물은 안쪽 지름이 1.5m가량 원형 석축이다. 성벽 서쪽 아래로 서문 터가 있다. 토축 아래 발굴중인 석축 유구가 보인다. 익산토성이 단순한 토성이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서문 터 앞에 발굴된 성 돌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저 정도라면 엄청난 석축이었을 것이다. 북쪽 끝 지점도 발굴 현장이다. 접근 금지다. 북쪽이라 그런지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있다. 성벽은 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어진다. 성벽 발굴이 한창이어서 그런지 잡목을 모두 벌채했다. 빈자리에 옛 성곽의 윤곽이 뚜렷하다.

동, 남쪽 끝 지점은 발굴현장이라 접근이 금지돼 있다. 지형이 모두 가파르다. 동남쪽 각대지점에서 남쪽 성벽을 타고 남문 터로 오는 도중 회곽도를 따라 봉긋하게 쌓은 토축이 보인다. 무너져 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매우 펑퍼짐하다. 초기 축성당시 전투 시 몸을 감추는 여장으로 활용됐음직하다. 이러한 형태의 잔존 토축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자연적인 가파른 산 능선을 그대로 두고 따로 방어용 토축을 쌓은 것이다. 작은 토성이지만 둘레길이 조성되면 익산의 또 다른 관광 체험 유적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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