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성위에서 바라본 화양읍

   
▲ 산성안 평탄지

   
▲ 인도교에서 오르는 지그재그 데크

   
▲ 주구산성과 청도천

   
▲ 집수정 추정지

   
▲ 파랑새 다리와 산성 전경

   
▲ 훈련장 추정지

 경북 청도군 이서면과 화양읍은 삼한 부족국가 이서국 영역으로 비정된다. 이서소국 또는 이서고국으로도 불린다. 다른 성읍국가와 마찬가지 뚜렷한 문헌이나 유물 유적은 드물다. 그러나 국명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뚜렷하게 등장한다. ‘이서국조’와 ‘미추왕 죽엽군조’ 등에 따르면 신라 3대 유리왕14년(37년) 또는 신라 14대 유례 이사금14년(297년) 이서국 군대는 신라 수도 금성을 침공한다. 신라는 군대를 동원해 방어한다. 그러나 물리치지 못하고 오히려 위협을 당한다. 이때 저마다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사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들은 신라군과 함께 이서국 군대를 물리친다. 싸움에 이기고 나자 이들은 홀연히 사라진다. 그런데 선왕인 미추왕 왕릉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이는 기이한 장면이 목격된다. 신라 사람들은 선왕이 음병(신령한 비밀군대)으로 신라군을 도왔다고 믿는다. 그리고 미추왕릉은 죽현릉이라고 불린다. 삼국사기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적혀 있다. 삼국유사 ‘노례왕조’는 이서국이 건무 18년(42년) 신라의 침공으로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삼국유사 침공 시기다. 왕명이 다르고 260년 격차를 보인다. 이는 비슷한 이름 ‘유리’와 ‘유례’의 혼동으로 인한 오기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침공 시기를 유례왕대로 보면 300여년 넘게 존속하다 패망한 국가로 볼 수 있다. 이서면과 화양읍 일대 340여개 지석묘는 이서국 당시 또는 이전 고대 지배계층 무덤으로 추정된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송읍리에 해발 217m 주구산이 있다. 청도읍 동북쪽 6km 떨어진 해발 697m 용각산 지맥이 돌출된 지점이다. 주구산은 남서쪽과 남동쪽이 높은 절벽이다. 북서쪽과 북동쪽은 소라리와 송읍리로 이어진다. 정상부에 고대 이서국 시기 쌓았다는 주구산성 또는 이서산성이 있다. 신라군의 공격을 받은 이서국 군대가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전멸당한 전적지다. 축조 시기는 삼국시대(AD 4C)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이 나와 당대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에는 통일신라 말 각축을 겨루던 후삼국시대 설화도 전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를 정복해 경순왕의 항복을 받는다. 그런데 항복을 거부한 신라 병사들은 이곳 주구산성에 진을 치고 완강한 저항을 계속한다. 왕건은 측근 유금필 장군에게 토벌을 명한다. 유금필은 마침 당에서 돌아와 봉성사에 머물던 보양국사를 만나 방책을 묻는다. 보양은 ‘주구산은 개가 달아나는 형상’이라며 ‘개는 밤에 지키되 낮에는 지키지 않고 또한 앞만 지킬 뿐 뒤는 지키지 않는다’고 일러준다. 말뜻을 눈치 챈 유금필은 군사들에게 밤중 배후 공격을 명한다. 마침내 산성은 함락된다. 산 이름이 주구산이 된 연유다. 이에 산성 또한 ‘주구산성’ 또는 ‘폐성’이라 불리게 된다.

성곽은 둘레 약 300m로 작은 규모다. 체성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직사각형이다. 남쪽은 천연 해자 청도천이 넓게 흐른다. 청도천이 깎아낸 암벽이 그대로 성벽이다. 자연방어망으로 삼은 것이다. 북쪽은 끝이 뾰족한 직삼각형이다. 끝 지점에 둔덕처럼 생긴 토성 유구가 남아 있다. 이곳에 북문 터로 짐작되는 석축이 보인다. 땅에 박힌 여러 개의 굵은 성 돌이 옛 문터임을 짐작케 해준다. 북문 터를 벗어나 북쪽 능선을 따라 곧장 가면 백곡토성이다. 이런 형태는 산성이 장기항전용 피난성 또는 남쪽 방어요새임을 보여준다. 산성 최고 높은 지점에 닿으면 동남쪽 멀리 청도읍 시가지, 남쪽 화양읍이 조망된다. 야산이지만 볼수록 지대가 험준하고 공간이 협소하다. 이서국의 대국방 전초 기지 또는 최전선이 충분히 될 만하다.

주구산은 청도읍 또는 화양읍에서 청도천을 넘어가야 닿는다. 주구산 입구에는 고찰 ‘덕사’가 있다. 청도천 콘크리트 교량과 200여m 떨어져 있다. 또 북쪽에 새로 놓은 인도교(파랑새다리)를 건너면 된다. 콘크리트 교량은 절 입구 데크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북쪽을 바라보면 청도천과 절벽이 함께 보인다. 산 아래 자동차가 다닐만한 길이 있다. 그 위 절벽이 주구산성의 성벽인 셈이다. 절 입구를 지나면 바로 산성 안이다. 이 절까지 자동차가 다닐만한 산길이 이어진다. 인도교 건너 절벽에 다닥다닥 붙여 설치한 지그재그 데크로가 있다. 이곳을 통과해 산성 위에 오르는 것도 무척 운치가 있다. 데크로는 걷기에 사실 조금 어지러울 정도다. 하지만 숨이 찰 정도로 걸으면 어느 순간 절벽위에 닿는다. 끝 지점은 다시 덕사 입구 길과 이어진다. 산성 위는 체육공원과 자연탐방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산성 옛 회곽로였을 길은 지금 한 바퀴 돌 수 있는 탐방로가 돼 있다. 왼쪽에 북쪽으로 이어진 회곽로는 절벽위를 따라간다. 걷다가 가끔 아래 청도천을 내려다보면 조금 아찔하다. 높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주구산성이 다시금 난공불락 요새임을 확인하게 된다. 북쪽 정상부에 닿으면 시야가 갑자기 좁아진다. 작은 길이 나 있다. 북문 터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산길은 백곡토성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등산로가 조성돼 많은 등반객이 지나다닌다.

산성 북쪽은 송읍리를 품고 있다. 이 마을은 산성 밖이다. 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이 여러 갈래 내리 뻗쳐 있다. 산성 회곽도 바깥은 또 벼랑이다. 남, 북 능선이 천혜의 방어망이다. 산성 안은 너른 평탄지가 여기저기 있다. 사방이 절벽인 산위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인공으로 조성한 게 틀림없다. 평탄지 북쪽에 지름 2∼3m 작은 연못이 보인다. 고대 산성 안에 장기항전용 식수원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자연탐방 ‘무당개구리연못‘이란 입간판이 달려 있다. 그 아래 여기저기 또 빈 터가 있다. 고대 산성이었을 당시 건물 터들이다. 특히 배드민턴장과 족구장 크기의 또 다른 평탄지는 군사훈련장이 분명해 보인다. 산성 안에는 지금 체육공원이 조성돼 있다. 전망대와 목계단, 육각정자, 파고라, 놀이터 등이 설치돼 있다. 덕사 뒷마당은 소나무 숲이다. 곧게 자라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들이 마치 옛 이서국 군사들의 사열 장면을 방불케 한다. 사찰 '덕사'에서 내려오니 절벽아래 '광복50주년 쇠말뚝을 뽑은 곳'이락 새겨진 작은 비석이 눈길을 끈다. 주구산성은 아직 발굴이 안 됐다. 발굴이 이뤄지면 고대국가의 정체가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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