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문 체성 오르는 계단

   
▲ 북문 터 위 동쪽 전경

   
▲ 북쪽 체성위 성황사

   
▲ 서문 터 복원 성벽

   
▲ 서문 터와 북쪽 체성

   
▲ 성밖에서 본 서문 터

   
▲ 성황사에서 내려다본 읍성안 전경

   
▲ 양양군청뒤 내성

   
▲ 읍성안 내성 성벽

   
▲ 현성공원 수령 공적비군

 강원 양양은 고대 고구려 땅이다. 당대 지명은 익현현이었다. 삼국통일전쟁으로 신라에 병합된다. 이후 고려시대 지명은 양주가 된다. 고려 원종1년(1260년) 지양주사를 파견한다. 양주는 조선 태조6년(1397년) 태조 이성계의 외가 본관이라고 해서 ‘부’(府)로 승격한다. 그리고 태종13년(1413년) 도호부로 거듭 승격한다. 3년 뒤 태종 16년 양양(襄陽)으로 지명이 바뀌게 된다. 오늘날 지명 ‘양양’은 이때 생겨난다. 양양 도호부는 한말까지 위용을 자랑한다. 그러나 1963년 당시 속초읍이 도시로 발전하면서 이탈한다. 이후 지금까지 침체와 쇠락을 거듭한다.

양양은 설악산 동남쪽, 동해와 접해 있다. 한계령 등 크고 작은 산맥이 내륙과 영동을 가른다. 고대부터 외침이 잦아 수많은 전란을 겪는다. 고려 고종8년(1221년) 거란이 침입해 힘겹게 막아낸다. 이런 공적으로 ‘현’은 ‘주’로 승격한다. 그리고 군사 직책 ‘양주방어사’를 수령으로 파견한다. 고종40년(1253년) 이번에는 몽골군 침략으로 함락된다. 수령 방어사는 낮은 직급의 ‘감무’로 강등된다. 회복된 시기는 원종1년(1260년)이다. 동해안은 잦은 왜구의 약탈이 항상 불안을 야기했다. 양주는 일찍이 군사적 요충지에 성곽을 쌓는다. 대표적인 성곽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양양읍성이다. 읍성은 행정치소로 관아가 자리한다. 그러나 양양읍성은 외적 방어라는 군사적 목적이 더 강했다.

초축 기록은 고려사(1451년)에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양주성 또는 현산성이었다. 고려 목종10년(1007년)의 일이다. 이 성은 우왕11년(1385년) 지양주사 허주가 왜구 방비를 위해 재수축 한다. 조선 태조2년(1393년) 읍성 안에 큰 불이 난다. 관아와 민가가 모두 소실된다. 이때는 관아가 자리해 읍치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는 토성이며 둘레가 1,088보라고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은 이보다 더 큰 규모를 기록하고 있다. 석축 둘레 403척, 높이 5척, 토축 2,825척, 우물 2기 등이다. 특이한 점은 ‘석축’의 등장이다. 양주는 조선 태종 13년(1413년) 양양도호부가 된다. 이 시기 동헌 중심으로 석축을 쌓은 것이다. 문종1년(1451년) 강원도감사가 ‘둘레 2,740척 성곽을 양양부와 원주 감영 군사 1,475명을 동원해 수축하게 해야 한다’고 조정에 청한다. 오늘날 성곽 형태는 이 시기 재수축한 것이다. 양양은 도호부 승격과 함께 그간 양주성 또는 현산성이라 불리던 성곽 이름은 양양읍성으로 굳어진다.

양양읍성은 북쪽 산성과 남쪽 평지성이 합쳐진 평산성이다. 관아 는 ‘여지도서’, ‘관동읍지’ 등에 나타나 있다. 객사, 아사, 향청, 작청, 군기청, 형리청, 관노청 그리고 누각 태평루 등이다. 특히 관동읍지는 동문 한수루, 남문 현산정 등 이름을 표기했다. 남문은 영조24년(1748년) 양양부사 박필정이 다시 세웠다. 문루만 표기된 서문은 숙종26년(1700년) 양양부사 남치훈이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형체조차 찾을 수 없다.

체성은 양양읍 군행리와 성내리를 감싸고 있다. 형체는 서쪽 현산공원과 북쪽 양양읍성 터널, 양양군청 뒤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윤곽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을 향한 ‘삼태기’ 형태다. 가운데 양양군청, 양양교육도서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답사는 양양군의회 옆 현산공원 진입로 출발이 제격이다. 공원은 데크를 타고 양양을 거쳐간 수령들의 공적비군을 따라 올라간다. 현상공원 정상에서 북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에 읍성 안 시가지가 조망된다. 둘레길 끝 대밭을 지나면 바로 서문 터다. 서문옆에 양양부사가 성황제 제수로 사용했다는 고치샘이 있다. 현산공원에서 보면 북쪽 끝 지점이다. 작은 도로가 지나고 성 안팎이 구분된다. 서쪽은 능선이 가팔라 외적이 기어오르기 힘든 천혜의 성벽이다.

서문 터를 지나 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읍성터널이 보인다. 옆에 북쪽 구릉을 향해 높고 긴 데크가 있다. 올라서면 성곽 정상부에 자리한 성황사에 닿는다. 성곽 초축 당시 성황당 자리에 지었다는 사당이다. 해마다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가 열린다. 양양군이 해마다 5월 펼치는 현산문화제도 그 기원이 이곳이다. 바로 옆에 양양읍 상수원이 있다. 상수원 철망 서쪽에 3.1만세운동 희생자를 기리는 충렬사가 있다. 모두 북서쪽 성벽위에 자리하고 있다.

북문 터는 왕복 두 기의 터널로 변했다. 한가운데 남북을 잇는 남문로가 지난다. 도로는 터널을 빠져나와 북쪽 44번 국도와 7번 국도와 이어진다. 두 길은 서쪽 동해고속도로 양양I.C에 닿는다. 교통 편의를 위해 성곽을 훼손한 것이다. 성벽은 터널 위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양양감리교회와 양양천주교회를 지나간다. 천주교회 서쪽에서 양양초등 앞 네거리까지 구릉이 동쪽 성벽이다. 지금은 동쪽 옆으로 도로가 나 있다. 양양군청 뒤에는 툭 튀어 나온 구릉이 또 있다. 구릉위로 고목이 자란다. 마치 옆 건물 양양도서관 담장처럼 보인다. 이곳 구릉은 읍성 안 또 다른 내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문 터는 양양지구대 옆이다. 남쪽 성벽은 서쪽 현산공원과 동쪽 주택가를 가르며 지나간다. 동문 터는 양양천주교회 옆 도로와 양양초등앞 도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성문은 현재 터는 물론이고 흔적조차 없다. 다만 서문 터 옆에 성돌로 쌓은 축대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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