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면게이트볼장옆 동쪽 반원형 성벽

   
▲ 상주보건지소뒤 성벽

   
▲ 상주보건지소뒤 서쪽 성벽

   
▲ 상주초등 동쪽 길옆에 방치된 지대석

   
▲ 상주초등옆 서쪽 성벽 기단석

   
▲ 생활체육공원 성벽 밖에서 본 전경

   
▲ 서북쪽 언덕 직전 성벽

   
▲ 서북쪽 언덕옆 내탁식 체성 성벽

   
▲ 서북쪽 작은 언덕 원경

  경남 남해군은 70년대까지 섬이었다. 지금은 남해대교, 노량대교, 창선대교 등으로 이어져 육지나 진배없다. 신라시대 지명은 전야산군(轉也山郡)이었다. 이후 35대 경덕왕 때 남해군(南海郡)이 된다. 남해군은 난포현(蘭浦縣: 현 이동면 난음리 일대)과 평산현(平山縣: 현 남면 평산리 일대)을 영현으로 거느렸다. 고려시대 남해현(南海縣)이 돼 현령(縣令)이 다스린다. 고려 말 공민왕7년(1358년) 남해안 일대에는 왜구의 준동이 극심했다. 이를 피해 치소를 육지로 옮긴다. 이전 초기 치소는 진주(晉州)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두었다. 이후 남해현은 하동현(河東縣), 진주 금양부곡(金陽部曲), 곤명현(昆明縣) 등과 통합, 분리를 지속한다. 치소가 되돌아간 최종 시기는 조선 세종19년(1437년)의 일이다.

고대 남해도 지리적 환경은 대마도와 가깝다. 왜구의 끊임없는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이에 신라시대부터 왜구 출몰지에 관방시설을 갖추었다. 남해도에는 어느 지역보다 많은 30여개의 성곽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인 조선 중종5년(1510년) 4월 제포, 내이포, 부산포, 염포 등지 왜인들이 변란을 일으킨다. 이른 바 삼포왜란이다. 모두 관군이 제압하지만 위기는 심해진다. 이때 해안 위주로 군사 전략적 요충지 방어가 논의된다. 조정은 해안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한다. ‘진’이 주둔지 본부라면 ‘보’는 하급부대에 해당한다. 이에 각급 규모에 맞는 군사를 주둔시킨다. 남해도에는 두 곳에 ‘보’(진보다 규모가 작은 부대)를 두었다고 한다. 그 둘레에 쌓은 작은 성곽이 보성(堡城)이다. '보성'은 외적방어 및 직접적인 전투시설이다. 그러나 주로 읍성이나 진성에서 거리가 먼 지점에 두었다. 이에 '진성' 보조기능을 하면서 평소 외적의 동태감시, 긴박 상황 시 주민대피를 우선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에 축성한 성곽이 ‘상주보성’이다. 상주리는 기암괴석이 절경인 금산을 북쪽에 두고 있다. 서쪽 천황산과 함께 산세가 좌우로 뻗어 내리며 감싸 안고 있다. 이 마을은 남해군 동남쪽 끝 지점이다. 이에 고대 왜구의 약탈이 잦았다, 임진왜란 초기 가장 먼저 점령된 지역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관방시설이 있었다. 석성을 쌓기 전 연산군 재위시절 목책을 세웠던 곳도 이 마을이었다. 그러나 ‘보’를 둔 직후 석성 개축은 삼포왜란 직후인 중종 16년(1522)의 일이다. 이때 쌓은 석성이 지금껏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위치는 금산 남쪽이고 상주포 바다 북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규모는 둘레 500여m에 이른다. 형태는 북쪽 낮은 언덕 빼기와 남쪽 평지를 아울러 둘러싼다. 축성초기 성벽 높이는 붕괴를 면하고 남은 높이로 미뤄 3∼4m로 추정된다. 축성방식은 내탁식 또는 협축식이 읽혀진다. 남쪽 평지 체성 축성은 협축식 흔적이 보인다. 안팎 양쪽에 성벽을 쌓고 속을 잡석과 흙으로 채웠다. 너른 판석을 깔고 굵은 기단석을 들여 놓았다. 위로 작은 성 돌과 함께 빈틈을 할석으로 메웠다. 이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 축성방식이다. 성문은 바다로 통하는 남쪽에 냈다. 다만 ‘보성’은 읍성과 달리 누각은 없었을 것이다. 성벽과 성벽사이 단조로운 성문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모습은 상주보건지소 뒤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치소 기능을 하는 읍성은 관아 건물이 빽빽하게 자리해 있다. 그러나 상주보성은 치소가 아니어서 이러한 관아 건물이 없다. 상주보성은 면사무소와 치안센터 등이 서쪽 성벽밖에 있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붕괴돼 높이가 낮아진 상태다. 그러나 서쪽 성벽은 전체 형태가 제법 온전하다. 이 구간 체성은 높이 1∼2m에 이른다. 남쪽을 바라보니 상주초등 교사와 운동장에서는 흔적이 지워졌다.

남문 터는 상주초등 앞 민가 사이로 추정된다. 둘러보니 주변 민가가 죄다 돌담이다. 아마 남쪽 체성을 이루던 성 돌들이 아닌가 싶다. 체성은 상주보건지소에서 북쪽 언덕 채전을 지난다. 그리고 안쪽 생활체육시설 축대처럼 이어진다. 서북쪽 작은 야산 위는 성곽의 북쪽 각대 지점이 분명하다. 여기서 금산이 바로 조망된다. 그런데 바깥 논으로 나와 보니 외관 성벽은 둥글다. 그러나 언덕위에 대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본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무너진 성벽은 성 돌이 작아 외관이 마치 주택가 담장 같다. 성벽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다. 성곽 뒤 북쪽은 성벽이 담장처럼 이어진다.

동쪽은 민가가 적고 너른 논밭지대다. 이곳에 본성과 동떨어진 약 30m 돌담장이 있다. 계단식 논을 지탱하는 논둑처럼 보인다. 추정컨대 대형 성곽 ‘용도’(성곽을 본성에서 두 갈래 길게 뻗어낸 성벽)처럼 전투 시 방어용인지도 모른다. 동쪽 성벽은 민가와 논둑을 따라가면 그 흔적이 확인된다. 동쪽 성벽은 상주면게이트볼장 앞 논둑에 큰 기단석들만 줄지어 서 있다. 본래 자리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동쪽은 성곽 안팎으로 논밭이 개간된 구간이 많다. 이 때문에 본래 기단석인지 주민들이 성 돌을 옮겨다 쌓은 논둑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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