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개봉 방향 무너진 성 돌

   
▲ 남문 터와 정상 간 무너진 성벽

   
▲ 동남쪽 산능선 따라 무너진 성벽

   
▲ 동문 터 창원방향에서 본 전경

   
▲ 동문 터에서 정병산 방향 무너진 성벽

   
▲ 동쪽 망루 터

   
▲ 동쪽 성벽 위에서 본 전경

   
▲ 동쪽 정병산 방향 성벽

   
▲ 무너진 성 돌 무더기

  경남 창원은 오늘날 마산, 진해와 통합을 이룬 거대 도시다. 그러나 고대 모두 해안가 고을로 왜구의 약탈이 빈번했다. 또 가야연맹이 강력하던 시기 고대국가 가야와 신라,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합천, 함안, 의령, 창원 등지서 김해와 부산으로 가려면 창원을 반드시 거쳐야한다. 후삼국시대 후백제는 호남이 그 영역이었다. 창원은 신라로 진출하는 후백제의 길목이기도 했다. 지금도 동쪽은 고대 가야 김해와 부산권이다. 두 권역은 정병산(566m), 비음산(510m), 대암산(669m), 불모산(801m) 등이 가로 막고 있다. 가야 시대 또는 후삼국시대 국가 간 첨예한 대치가 짐작된다. 창원 일원에는 지금도 많은 성곽 유적이 있다. 진례산성을 비롯 성산산성, 이산성, 구산성, 무성리산성, 염산성, 검산성, 화청리산성, 회원현성 등이다. 고려 말 조선 초는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해안가 방어력을 강화하던 때다. 이 시기에는 고산성, 합초성, 창원읍성, 진해현성, 웅천읍성 등을 쌓았다.

창원시가지 동쪽 비음산에 고대 산성이 있다. 진례산성 또는 비음산성이라고 불린다. 김해 진례면(옛 진례현) 또는 산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비음산 아래 서쪽은 창원분지이고 동쪽은 김해 평야로 옛 가야 영역이다. 가야 또는 신라 중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성인지 논란이 생길만하다. 아마 주방어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산성은 해발 510m 비음산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포곡식 산성이다. 비음산은 창원분지와 김해벌판을 가로지르는 낙남정맥에 속한다. 체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비음산은 동, 남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방향 공격은 방어와 차단이 손쉽다. 그렇다면 가야 산성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방어는 북, 서쪽 용추계곡이 가장 약하다.

지리지 ‘여지집성(輿地集成)’에는 가야 수로왕이 두 번째 왕자 허석을 진례성 성주로 봉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허석은 비음산에 토성과 천문을 살피는 ‘비비단’이란 첨성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김해군도호부 고적’조에는 ‘진례성을 신라 호족 김인광(金仁匡)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대로라면 가야시대 쌓았고 통일신라시대 수축한 산성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일설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수축 가능성이 제기됐다. 영의정 유성룡이 ‘창원부(府=조선조 행정구역)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항전했다’고 조정에 올린 글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산으로 피신한 백성들이 재물과 관아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다‘고 덧붙였다. 또 선조 34년 체찰사 이원익이 조정에 올린 장계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다. 그는 ‘창원부성은 왜병에게 분탕을 당했으나 경상우도병마사 겸 창원부사 김응서를 주축으로 군, 관, 민이 끝까지 저항했다’고 밝혔다. 이는 고대 축성했지만 방치된 성곽을 전란으로 급히 수축해 백성들을 피신시켰다는 뜻이다. 진례산성은 규모가 둘레 3.6km로 알려져 있다. 축성은 협축식 또는 내탁식을 혼합했다. 협축식은 양쪽에 성벽을 쌓고 안에 잡석을 채우는 방식이다. 내탁식은 산을 깎아내고 바깥 한쪽에 벽을 쌓고 그 안쪽을 채운다. 진례산성은 동남쪽에만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거의 무너져 전체 윤곽은 상상하기 어렵다.

◇답사 = 진례면 평지마을과 창원 중앙역 출발 두 가지다. 평지마을은 남산재까지 임도가 나 있다. 중앙역을 택하면 용추계곡이다. 계곡은 지형이 완만해 걷기 편다다. 용추1교에서 용추11교까지 다리가 놓여 있다. 그 끝이 동문과 서문 터 갈림길이다. 여기에 정자 포곡정이 있다. 논밭 터와 건물 터, 우물 터 가 보인다. 마을을 이뤄 살았던 흔적이다. 정자에서 동문과 남문 터 등산로가 갈라진다. 동문 터까지 600m, 남문 터까지 300m 이정표가 서 있다. 남문 터는 동문 터보다 가깝다. 하지만 더 가파르다. 동문은 창원과 김해를 잇는 고갯마루다. 고지대 길이라 걷느라 숨이 차다. 동문은 무너졌지만 육중한 장방형 초석이 옛 모습 그대로 지탱하고 있다. 성벽은 여기서 정병산과 비음산 양방향으로 갈라진다. 두 갈래 모두 산 능선 따라 산 위로 치켜 올라간다. 성벽 돌출부 치성은 두 곳, 망루는 다섯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치성은 능선마다 꺾이는 지점이다. 망루는 비음산과 날개봉, 그리고 정병산 방향 고지대에 짐작되는 터만 있다. 가파른 절벽 따라 쌓은 체성은 천혜의 방어망이다. 체성 밖은 가파른 급경사 또는 수직 벽이기 때문이다. 곳곳에 무너진 성 돌이 나뒹군다. 그 옆은 폭 1m 가량 산길이다. 무기와 인마가 지나 다녔던 ‘회곽도 (廻郭道 = 순찰과 군사 물자를 운송했던 산성 안 길)’로 여겨진다. 비음산 정상은 너른 평탄지다. 최고 지휘관 장대 터로 짐작된다. 멀리 김해평야와 눈 아래 창원분지가 조망된다. 다시 남서쪽으로 내려간다. 남문 터는 북서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왼쪽에 성 돌 무더기가 눈에 띈다. 데크 계단과 등산로 옆에 무너진 긴 성 돌 무더기가 보인다. 눈대중으로 측정해본 길이만 해도 약 200m로 추정된다. 초기 축성 시 높고 긴 성벽이 상상된다. 이어 날개봉과 비음산 정상 사이 남문 터가 등장한다. 남문도 위치는 고갯마루다. 아래가 고산신덕마을이고 반대편이 포곡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체성은 날개봉으로 치켜 올라간다. 높은 성벽은 상상일 뿐 거의 무너지고 성 돌만 흩어져 있다. 남문 터는 폭 3∼4m로 양쪽에 낮은 초석만 버티고 있다. 한시바삐 옛 성곽이 복원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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