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일 수필가

 지난주에 비가 내리는 날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부하 직원들에게 부침개가 생각난다면서 밥을 사줬다. 부침개 삼아 식당에서 파는 배추전을 곁들였다. 그리고 군대에서 비오는 날 부침개 추억이 생각나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안 초소에서 처음으로 취사 당번을 맡을 때였다. 그때도 1년 중 지금 이맘때 쯤 이었다. 야간 경계근무를 마치니 봄비가 내린다. 고참들이 내무반에서 고스톱(화투)을 치고 나는 고참들이 먹을 부침개를 붙이고 있었다. 한참 부침개를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순찰장교가 취사장으로 들어왔다. 나는 장교에게 부침개를 선사하며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 내무반이 정리되어 화투 치는 장면이 들키지 않았다.

나는 취사장에서 부침개를 만든 것이 큰 죄인 것처럼 안절부절 하는 시늉을 했다. 장교는 부침개 해 먹는게 큰 죄는 아닌데 뭐 그렇게 겁을 먹느냐고 반응한다. 나도 알고는 있지만 내무반을 보호하기 위해 바짝 쫄은 체 했다. 어쨌든 그날 순찰장교는 미끼에 속아 소초원의 일탈(이제 공소시효가 지나 근무수칙위반으로 처벌하지 못할 것이다.)을 체크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봄비 에피소드를 소환한 김에 우리 국민의 봄비 정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연배에는 봄비에 나름대로 추억이 있는 사람이 많다. 내가 자란 1970년대에는 나름대로 기후의 패턴이 지켜지던 때라서 계절과 비의 연결에 규칙성이 있었다. 봄비는 봄을 재촉하는 비로서 계절이 바뀐다는 의미다. 겨울철 첫눈과 비슷한 느낌이다.

비 때문에 행동이 부자유스러워지면 실내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빗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부침개를 먹는 이유도 비가 와서 기온이 내려가지만 당시 가옥 구조상 겨울처럼 바로 난방을 하기는 어렵고 전을 꿉는 곤로와 뜨거운 부침개를 통하여 따뜻함을 즐기는 즐거움이 있었다. 봄비와 관련된 문학작품도 많다.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이수복의 봄비). 7080가요에 봄비를 소재로 한 노래가 많다.

이렇게 봄비에는 사전적인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름비나 가을비와는 전혀 다르다. 이는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로서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민족성에 녹아있다. 외국인이 봄비를 단순히‘spring rain’으로 해석한다면 알 수 없다.

물론 외국어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들의 정서가 있다. 미국에서 의사가 된 친척에게 아직도 가장 어려운 것은 언어장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 미국에 있었지만 미묘한 감정이 실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여행을 할 때 가이드의 말도 떠오른다. 가장 짜증날 때는 TV 코메디 프로를 보면서 의미는 알지만 그게 왜 웃기는 것인지 이해가 전혀 안될 때라고 한다. 국민의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전달만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민족과 시대의 역사와 감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들은 키워드가 되는 단어에 담겨있다. 단어 뿐만 아니라 몸짓 같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도 담겨있다. 우리에겐 봄비가 이런 단어의 진수라고 보여진다.

언어 뿐만 아니라 날씨 또한 단순하지 않다. 같은 봄비라도 지금 내리는 비는 단순한 봄비와 또 다르다. 이미 4월 후반이라 봄을 재촉하는 비라는 이미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의미의 비가 아니라 삶에 직접 연결되는 생존의 비가 된다. 곧 오게 될 본격적인 농사철을 준비하는 의미다. 또한 미세먼지나 황사를 씻어내는 기능도 한다.

이번 비는 예보와는 다르게 작은 강수량의 비가 내리고 금방 그쳤다. 올해 봄에 비가 오는 말은 자주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가뭄이라고 한다. 산불도 많이 난다. 강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무에 물이 오르기 전이라 금방 증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가 좀 더 와야 하는데 걱정이 된다.

지난 20일은 24절기 중 하나인 곡우(穀雨)였다. 농사준비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이날 내린 비는 농사를 짓는 비가 된다. 이제 농사를 짓기에 충분한 비가 내려야 할 때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