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복원한 정상부 망루

   
▲ 남문 주변 석축

   
▲ 남문 터 추정지

   
▲ 북서쪽 벼랑위 토성

   
▲ 북서쪽 토축 체성을 올려다본 전경

   
▲ 성위에서 바라본 마산만과 시가지

   
▲ 정상부 건물 터 주초석

   
▲ 정상부 망루

   
▲ 정상부 평탄지

   
▲ 환주산 지명 유래가 된 바위

  경남 창원은 일찍이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근대 발굴 유적은 B.C 3세기 이미 성읍국가 의 존재를 보여준다. 삼한시대 현 마산합포구 일대는 포상팔국 가운데 골포국으로 비정된다. 골포국은 신라 진흥왕23년(562년) 신라에 병합된다. 이때 굴자군(屈自郡, 현 창원시)에 속하게 된다. 골포국은 문무왕16년(676년) 골포현(骨浦縣), 경덕왕16년(757년) 합포현(合浦縣)으로 바뀌게 된다. 고려 성종2년(983년) 합포현에 조창(漕倉)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한다. 이즈음 합포는 회원현으로 바뀌고 현령이 파견된다. 조선 태종8년(1408년) 회원현은 인근 의창현과 통합돼 창원부(昌原府)로 승격된다. 창원은 두 고을 지명 가운데 글자를 합친 것이다. 이어 1415년 창원도호부로 승격하게 된다. 1663년 대동법이 시행된다. 이에 따라 회원현에는 낙동강 하류 유역 조공미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조창이 설치된다. 이와 함께 관아와 고을이 형성된다. 오늘날 마산의 도시 기반이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지명은 ‘산호포’(山湖浦) 또는 오산진(午山津)이었다. 그런데 한때 전염병을 만연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오산(午山)을 마산으로 바꾸게 된다. ‘午’자는 ‘馬’자와 다르다. 그러나 뜻은 같다고 한다. 오늘날 지명 ‘마산’의 탄생 일화다.

경남 창원 시 마산합포구 자산동에 회원현 치소로 비정되는 성 터가 있다. 마산의 대표적인 명산 무학산 자락 143m 환주산(또는 추산) 서남쪽을 감싸 안은 회원현성이다. 주민들은 ‘자산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아마 환주산의 다른 이름(자산)에서 따왔을 것이다. 11세기 이전 고려 초 쌓은 이 성은 당대 회원현 읍치이면서 남해안 방어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근 마산만과 진해만이 가까워 왜구를 물리치기 쉬운 위치다. 원나라 지배기 충렬왕 4년(1274년) 세조 쿠빌라이칸은 고려를 압박해 일본 원정을 기도한다. 이때 회원현성은 여·몽 연합군 주둔지가 된다. 연합군은 두 차례 원정에 나서지만 모두 실패한다. 고려 충렬왕1년(1281년) 쿠빌라이칸은 환주산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장기 주둔케 한다.
실패를 만회하고 재차 원정을 준비한 것이다. 이때 군사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우물을 파도록 지시한다. 이 우물이 오늘날 마산합포구 자산동 명소 ‘몽고정’이다. 몽고정은 7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인근 마을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맑고 깨끗하다고 한다. ‘고려정’ 또는 ‘광대바위샘’이라고도 불린다. 최근 발굴에서 성 안 동쪽과 북쪽에서 건물 터가 확인돼 당시 군사 지휘부로 추정된다.

원나라는 충렬왕6년(1280년) 회원현 즉 합포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설치한다. ‘정동’은 일본 정벌을 뜻한다. ‘행중서성’은 중앙정부 중서성의 지방파견기관이다. 회원현성을 일본 원정 영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다. 이 시기 우리나라 남해안은 왜구의 출몰이 빈번해진다. 이에 회원현성에 수군절도사영이 자리한다. 남해안을 방어 하는 수군 거점 지휘부로 떠오른 것이다. 고려 우왕4년(1378년) 절도사영은 합포로 옮기고 세종12년(1430년) 석축으로 수축한다. 회원현성은 이 무렵 폐성의 길로 접어든게 아닌가 싶다.

성곽은 남북이 길고 동서 짧은 장타원형이다. 환주산 서, 남쪽 계곡을 감싸 안아 포곡식 산성으로 분류된다. 규모는 정상부를 기점으로 둘레 약620m로 확인된다. 발굴결과 폭 3m북문 터와 7m 동문 터가 드러났다. 동쪽 체성은 산 중턱 창원시립박물관 도로 개설로 잘려 나간 상태다. 그러나 이 도로 아래 약 150m 토축이 남아 있다. 북쪽 체성은 문신미술관입구에서 절벽 위를 따라 정상부까지 남아 있다. 초기 토축은 폭 4∼5m, 높이 4∼5m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져 본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현재 잔존 토축 단면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잘라낸 단면을 보면 고대 토성 축성기법을 읽을 수 있다. 바닥을 다진 뒤 진흙과 나뭇잎 숯 등을 차곡차곡 쌓았다. 하지만 초기에는 판축을 덧대고 직사각형으로 쌓은 긴 토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신라의 전형적인 판축기법이다. 그렇다면 축성시기를 거슬러 올라 가볼 수도 있다. 신라의 성곽을 고려시대에도 수축해가며 사용했던 것이다. 판축기법은 성벽의 견고함은 물론 성 돌을 구하기 어려운 고지대 성곽 축성이 손쉬운 점이 장점이다. 북서쪽 토축 바깥 아래는 마산합포구 추산동이다. 도심에서 보기 드문 가파른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의외로 아찔한 산세가 눈앞을 어지럽게 한다. 바다에서 상륙해 공격해오는 외적에게는 천혜의 요새다. 절벽 위 토축이 방어에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남쪽은 자산천이 흐른다. 천연의 해자다.

성 터를 찾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손쉬운 길은 무학산 자락 환주산을 찾으면 된다. 무학산이 학이라면 환주산은 머리와 목에 해당한다. 산 남동쪽 추산공원에 창원시립마산박물관이 있다. 그 뒤로 문신미술관이 보인다. 입구에서 왼쪽 길을 따라가다 남문 터 추정지 주출입구 데크를 딛고 들어간다. 여기서 곧바로 북서쪽 체성을 만난다. 가파른 회곽도를 올라가면 정상부에 닿는다. 오른쪽에 긴 언덕처럼 보이는 토축이 이어진다. 토축과 그 아래 절벽이 체성인 셈이다. 체성 중간쯤 발굴당시 토축을 잘라 단면을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고대 토성 축성방식을 읽을 수 있다. 토축 위로 둘레길이 나 있다. 주위로 굵은 소나무가 자란다. 이 토축이 북서쪽 체성에 해당한다. 정상에는 제법 너른 터와 함께 2008년 복원한 망루가 서 있다. 이곳은 지휘부가 머물던 장대 터로 추정된다. 망루 터에는 본래 마치 염주 알을 꿴 듯 사람 키 높이 바위 10여 개가 둥글게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런데 망루를 복원하면서 사라지고 지금은 한 두 개만 남아 있다. 환주산의 이름을 바위 모양에서 본 따 지었다고 한다. 정상부에 서면 동남쪽에 거제만, 합포만, 마창대교가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무학산 오르는 산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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