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쪽 성벽위 장대터에서 바라본 임진강

   
▲ 남동쪽 임진강

   
▲ 동쪽 장대터 추정지

   
▲ 고구려 축성방식을 보이는 동쪽성벽

   
▲ 밖에서 바라본 동쪽성벽

   
▲ 동문 터 또는 입구 추정지

   

   
▲ 추정 동문 터밖 절벽위 여장격 성벽

   
▲ 성안에서 본 동쪽 성벽과 회곽도

  한반도 중부에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임진강이 흐른다. 북한 땅 강원도 법동군 두류산 남사면 마식령 근처에서 발원한다. 휴전선을 거쳐 경기 파주시 문산읍에서 한강과 합류하고 서해로 흘러든다. 한강으로선 큰 지류다.

‘삼국사기’에 임진강은 ‘호로하’ 또는 ‘표하’로 기록돼 있다. 임진은 강의 하류에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이에 우리말로는 ‘더덜나루’, ‘다달나루’라고도 불렸다. 삼국시대 이 강 가까운 고을이 고구려의 진임현 또는 오가홀이었다. 신라가 점령해 임진현으로 바꾸고 그대로 조선조에 이른다. 이 고을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군내면에 편입된다. 이후 오늘날 문산읍이 된다. 강의 이름이 임진현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임진강은 지형적 특성으로 5~7세기 삼국시대 세력다툼의 각축장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고구려 남하에 대비한 백제와 신라로서는 한강이북 국경이었다. 그만큼 군사전략적 요충지였다. 지금도 남, 북간 경계선을 치달린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는 임진강 중류 마을이다. 이 마을 강변 북쪽 절벽(단애)위에 너른 삼각형 구릉이 있다. 그 위에 고구려 보루(일종의 성곽) 호로고루 터가 있다. 이름이 ‘호로’이고 ‘고루’는 ‘옛 보루’라는 뜻이다. 보루는 규모는 작지만 일종의 성곽이다. 또 다른 어원은 이 부근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忽) : 호로’와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져 됐다는 설이 있다. 주민들은 호로고루를 자미산 또는 재미성이라고 부른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 기록은 1670년(현종 11)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이다. 위치와 경계지점, 지형 설명 등이 담겨 있다. 특히 ‘삼국시대 군사가 주둔, 방어하던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경기읍지’에는 ‘당나라 장군 유인궤가 군대를 이끌고 호로하를 끊고 신라 칠중성을 공격한 곳이 바로 이 성이다’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지금도 호로고루는 개성과 서울을 잇는 길목이다.

호로고루는 자연스레 형성된 강과 절벽을 최대한 이용해 축조한 성이다. 노동력을 줄이고 외적 방어기능에만 충실한 것이다. 이 성은 임진강 북쪽 단애 위 평지에 있다. 성곽 형태는 북서쪽을 향하는 직각삼각형이다. 임진강은 전체적으로 한반도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호로고루에서는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른다. 강물이 남북을 오르내리며 흐르기 때문이다. 성 북쪽은 원당리에서 지류가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강과 하천 물살은 남북 모두 높은 수직단애와 직각삼각형 분지를 형성한다. 호로고루는 이 분지에 있다. 강물과 하천은 자연 방어망 해자이다. 물살이 깎아낸 절벽은 천혜의 성벽이 된다. 규모는 둘레 400여m 남쪽 성벽(=절벽) 160여m 북쪽 성벽 140여m 규모다. 면적은 600여㎡다. 강변 쪽 절벽 높이는 10여m로 짐작된다. 인공 축조 성벽은 직각삼각형 밑변격인 동쪽에만 높게 쌓았다. 토축을 쌓고 밖에 석축을 보강했다.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방식이다. 중국 집안 국내성과 평양 대성산성처럼 견고하다. 지금도 길이 90여m 높이 20m 가량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다. 얼핏 보면 마치 큰 언덕처럼 보인다. 성벽 정상부 강변방향 끝 지점에 장대 터이다. 장대는 직각삼각형 북서쪽 끝 지점에도 두었다. 지금은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세운 망향단이 있다.

성문 터는 동쪽 성벽 끝과 강변 수직절벽이 만나는 지점으로 추정된다. 이곳 이외 성문 역할을 한 곳은 찾을 길이 없다. 토축 바깥 성벽은 현무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아올렸다. 이 일대는 화산폭발지형으로 현무암이 많다. 석축은 대체로 각진 부분이 없다. 전반적으로 곡선으로 처리했다. 위로 쌓아 갈수록 고구려의 전형적인 축성방식 들여쌓기가 확인된다. 성안 평지는 트인 이곳으로만 드나들 수 있다. 성안에는 집수정 터가 발굴됐다. 강을 끼고 있지만 식수원 확보는 필수불가결 했던 것이다. 동쪽 성벽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수직절벽이 이어진다. 절벽위에 사람 무릎높이 폭 1∼2m 성벽이 이어진다. 이곳은 성 터 밖이다. 그러나 호시탐탐 적은 성벽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우회도 획책했을 것이다. 성 밖에서 강을 건너 기어오르는 적을 무찌르던 성벽 위 여장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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