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감영문(중원루)

   
▲ 청녕헌

   
▲ 중원루 안쪽 전경

   
▲ 예성별관 편액 내삼문

   
▲ 동헌 청녕헌

   

   
▲ 공원안 보호수 느티나무

충북 충주는 부산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에서 위상이 높은 고을이다. 영남대로는 신라 아달라왕3년(156년) 개척한 하늘재(계립령)와 이어진다. 군사 거점으로 중요성 또한 그만큼 큰 것이다. 또 남한강 수운과 육로의 사통팔달 요충지다. 동쪽으로 제천, 남쪽으로 괴산 경북 문경, 서쪽으로 음성, 북쪽으로 경기 여주와 강원도 원주에 접한다. 삼국시대 4세기 전 백제영역이었다가 고구려 징수왕이 남하하면서 점령해 국원성이 된다. 551년 신라 진흥왕이 다시 점령, 신라 땅이 된다. 557년 신라의 9주5소경 가운데 소경이 된다. 이때 수도 금성 인근 부유한 백성들이 이주해 고을 규모가 커진다. 대가야 멸망 후 유민들도 상당수 이주해온다. 신라 경덕왕 때 중원경으로 바뀐다. 고려시대 충주목이 된다. 이 무렵 한때 국원경으로 동경(오늘날 경주), 남경(오늘날 서울)과 맞먹는 큰 규모 고을이 된다.

지리적으로는 한반도 한가운데 해당한다. 이 때문에 남, 북 외침 때마다 온갖 수난을 겪는다. 고종40년(1253년) 몽골군 5차 침입 때 극렬한 격전지가 된다. 이 무렵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쳐 큰 공을 세운 승려출신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와 있었다. 그는 충주남산성으로 백성을 피신시키고 관군과 함께 모집한 의병들로 항전한다. 이들은 70일간 전투 끝에 마침내 몽골군을 물리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몽골군은 고려에서 철수한다. 그러나 몽골군은 이듬해 6차 공격 때 또 충주를 노린다. 이 때도 백성들은 온힘을 다해 물리친다. 이듬해 1255년 10월에는 충주 별초군이 하늘재 몽골군을 기습 1천여 명을 사살한다. 1256년 몽골군은 분풀이로 충주성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미 월악산성으로 피난해 있었다. 몽골군은 월악산성 공격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친다. 두려움에 떨던 몽골군은 퇴각 결정을 내린다.

이처럼 충주는 오랜 기간 한반도의 중원을 지키며 내우외환을 함께 겪은 고을이다. 일련의 역사적 사건만 봐도 충주는 고대부터 군사행정 중심치소임에 분명하다. 현재 터만 남은 충주읍성은 조선후기 축성 기록과 지도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 터에 이미 이전 고대 성곽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중 신라 문무왕13년(673년) 축성한 난장성 또는 낭자성이 위치로 보아 가장 유력하다. 특히 신라, 고려시대 치소성 존재는 1978년 충주 문화재애호모임 ‘예성동호회’가 발견한 ‘예성심방석’이 입증해 준다. 이 돌에는 연화문과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조각돼 있다. 이에 고려 충렬왕3년(1277년) 재축성했고 별호가 蘂城(예성 ‘꽃의 성’이란 뜻)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미 충주는 고대 읍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성곽 존재는 분분명하다. 전란 초기부터 한양 도성을 노리고 영남대로를 따라 북상하던 왜군은 충주로 곧장 진격한다. 초조해진 선조는 충주에 성이 있는지를 묻는다. 류성룡은 ‘성이 있기는 하지만 토적도 방어하기 어렵다’고 대답한다. 당시 제대로 된 성곽이 없었던 것이다.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임명, 충주로 내보낸다. 그가 이끄는 조선군은 탄금대에 진을 친다. 그러나 중과부적인데다 전략을 제대로 못 세워 전투는 개전 초 대패하고 만다. 신립은 자결한다.

오늘날 터로 남은 충주읍성은 조선후기 고종 3년(1866) 수축한다. 병인양요 직후다. 고종은 전국에 유사시 대비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성곽과 군기고를 고치고 부대를 배치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충주목사 조병로는 고종6년(1869년) 2월 옛 터를 더듬어 재수축에 나선다. 그리고 10개월만인 11월 완공한다. 읍성은 평지성이었다. 형태는 동북 타원형, 동서 장방형이다. 마치 머리를 동쪽에 둔 도끼처럼 생겼다. 규모는 둘레 1,200m, 폭 7m, 높이 6m로 알려져 있다. 4대문을 비롯한 비상시 통로 야문(夜門)과 수구문을 냈으며 문루를 지키는 수문청을 두었다. 문루는 동문 조양문, 서문 휘금문, 남문 봉이문, 북문 경천문 등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객사, 아사, 남별당, 후영아사, 훈련청, 향청, 군관청, 기패관청, 양진창, 사창, 관청, 주사고, 군기고, 화약고, 고마청, 실록각 등을 두었다. 또 연못 두 곳과 우물 3기도 있었다. 이때 전경은 1872년 제작된 충주목지도에 나타나 있다.

  구한말 충주는 격랑에 휩싸인다. 고종의 비 민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 무렵이다. 이때 전국에서 불길처럼 의병항쟁이 일어난다. 춘천 출신 유학자 유인석도 의병을 모아 대일본 항전에 나선다. 충주는 일본의 통신선 통과지점이었다. 유인석은 이를 노려 1896년 의병 4천여 명을 이끌고 충주읍성을 공격한다. 수적 우세 의병들은 읍성을 점거한다. 하지만 4대문 문루와 수문청이 소실된다. 이후 읍성은 한동안 방치되다가 일제강점기 시가지 발전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헐리게 된다. 연못은 소학교 건축을 위해 메워지고 성벽과 옛 건물 또한 비슷한 이유로 철거된다. 다행히 지금은 복원한 관아 건물로 동헌 청녕헌과 내아 제금당, 충주성사적비가 남아있다.

답사는 남문 봉이문 터에서 출발, 동, 북 서문터를 거쳐 되돌아오면 읍성 밖을 한 바퀴 돌게 된다. 동쪽 동촌사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구. 법원 방향으로 동문 조양문 터가 나온다. 이어 북쪽으로 조금 가다가 중앙지구대 방향 보문당 동쪽에 북문 경천문 터가 나온다. 서문 휘금문 터는 중앙여관 북쪽에 있다. 남문 봉이문은 아시아극장 옆에 있다. 충주읍성 터는 1983년까지 중원군청사였다가 지금은 관아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옛 관아 건물 두 동과 비석, 고목이 반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