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일 수필가

지난주 광복절 전날(14일) 아침에 갑자기 재난문자 메세지가 떴다. 고령의 사설 목장에서 기르는 암사자 한 마리가 기르는 우리에서 탈출하였다고 한다. 요즘 갑자기 악어나 아나콘다 등 외국 동물이 출현한 뉴스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그 암사자는 멀리가지 못하고 인근 숲에 숨어 있다가 바로 사살되었다. 숨은 곳이 우리에서 4m 떨어졌다고도 하고 20~30m라는 말도 있는데 어쨌든 가까운 거리다. 애시당초 도망갈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이 사자는 국제멸종 2급의 희귀종이라고 한다. 종의 보전을 위해서도 사살하지 않고 마취하여 생포했어야 하지만 인근 야영장이나 인가의 안전을 위해 사살하였다고 한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그런데 숨는 것은 사자답지 않다. 사자는 여러 동물이 사는 아프리카 사바나를 호령하며 공개적으로 추격하여 사냥감을 잡는다. 먹이가 되는 동물들은 사자를 보고 도망을 간다. 밀림에서 동물들이 호랑이가 나타나서 도망가는 장면은 별로 없지만 초원에서 얼룩말이나 사슴과 같은 초식동물이 사자를 보고 도망가는 장면은 인터넷에서 흔히 본다.
사자는 낮잠도 공개적으로 여유롭게 잔다고 한다. 무서워서 숨어서 자는 동물들과는 격이 다르다. 잠을 잔다고 해서 다른 동물들이 함부로 사자를 건드리지 못한다. ‘잠자는 사자’라는 말은 이런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사자의 이름은 사순이라고 했다. ‘○순이’나 ‘○돌이’는 보통 동물의 이름을 명명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호랑이를 호돌이나 호순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친근하지만 동물의 왕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이름이다.
사순이의 나이는 20살로서 사람으로 치면 80세라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우리에 갇혀 지내며 한 번도 바깥구경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유배생활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데 사순이의 삶도 이런 삶이다.

우리에 있는 사순이는 순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자에게 바라는 것은 순둥이가 아니다. 사자로서의 무서움과 당당함을 원한다. 순한 동물은 개나 고양이 같은 가축들에게나 필요하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 사살된 사순이의 모습을 보니 사자의 위엄은 전혀 없고 그냥 도살된 가축의 모습이었다.

야생의 사자는 백수의 제왕으로 불린다. 객관적으로 사자보다 강한 동물도 있겠지만 왕의 포스는 사자를 따라갈 동물이 없다. 하지만 사순이에게 이런 포스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야생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고 도망치는 동물을 보지 못했으니 다른 동물과의 관계는 전혀 몰랐다. 사자다움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요즘 왕의 DNA라는 말이 갑자기 유행어가 되었다.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인 DNA는 생물의 특징을 결정한다. 사순이도 사자의 DNA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라면 왕후장상이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는 말이 나오지만 동물의 종은 과학적으로 따로 DNA가 있다. 그러나 사순이는 후천적으로 본능이 삭제 당하여 사자의 위엄이 없었다. 사람도 노예생활을 오래하면 노예 근성이 몸에 밸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순이를 보면 마치 과거에 사화에 연루되어 쫓겨나 숨어 사는 왕족의 후손이 자신이 왕족인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 정변이 일어나 이런 왕족의 후손들 중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왕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왕으로서 교육을 받지 못해 신하들에게 휘둘려 허수아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사례로 강화도령으로 불리는 철종이 있다. 이들은 왕으로 지내는 동안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종의 보존을 위해 동물을 동물원에서 기르는 것이 과연 온전한 방법인지 의문이다. 하지만 사자는 사자다. 야생에서 다시 생활한다면 언젠가는 사자로 돌아올 것이다. 다만 사순이에겐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지난 15일 광복절을 맞아 일본 식민지 시절 36년간 우리의 신세가 과거 사순이와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압제 속에서 일본이라는 창살에 갇혀있던 우리민족은 노예생활을 했다. 36년 만에 해방을 맞았지만 식민지 근성에서 벗어나는데 애를 먹었다. 한동안 독립하기까지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독림 투사들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한국인의 DNA를 유지하였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다.

그런데 한국인의 DNA는 과연 사자의 DNA처럼 강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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