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배량성 남쪽 잔존 치성

   
▲ 가배량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배항

   
▲ 남쪽 체성 전경

   
▲ 남쪽 체성과 붙은 치성

   
▲ 남쪽 체성에서 바라본 덕원해수욕장과 율포만

   
▲ 동남쪽에서 바라본 체성 전경

   
▲ 서쪽 각대에서 바라본 체성위 전경

   
▲ 남쪽 체성에서 바라본 덕원해수욕장과 율포만

   
▲ 수풀에 쌓인 해자 유적

   
▲ 옛모습대로 남아 있는 남쪽 체성

  경남 거제는 지형적으로 일본 대마도 북안과 매우 근접해 있다. 삼한시대 변진의 두로국시대부터 왜구의 침범이 잦았다. 고려 말 대마도가 왜구 근거지였을 당시 거제는 시시때때로 약탈을 당했다. 이들의 등쌀에 백성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심지어 모두 떠나 섬이 황폐화된 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 국방력 강화 움직임이 본격화된다. 이때 해안가 위주로 진을 설치하고 성곽을 쌓는다. 세종2년(1420년) 경상도 안무사가 가배량에 수군만호진을 설치한다. 가배량은 뒤에 가리산을 등에 업고 바다를 앞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경남 거제시 동부면에 있다. 동부면은 해발 565m 노자산을 중심으로 동쪽 학동만, 서쪽 바다건너 한산도다. 동남쪽 안산 아래 율포만을 안고 있다. 여기서 북서쪽 안산과 북동쪽 동망산 사이 고개를 넘으면 포구 오아포가 있다. 안산 북쪽 자락과 노자산 기슭을 감싸며 가배항을 끼고 있다. 오아는 숲을 이뤄 검푸르다는 뜻이다.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통영 한산도 허리춤에 닿는다. 거제도 바다는 고대부터 대마도를 오가는 뱃길이었다. 둔덕, 동부면에서 해류가 대마도까지 금방 닿는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세곡선 항로였다. 낙동강 경상도 조운선들은 견내량을 지나 서해로 갔다. 송악(현 개성)과 한양(현 서울) 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운선을 노리는 왜구들도 많았다. 이들은 거제도 해안을 수시로 약탈했다. 이에 세종 원년(1418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다. 그리고 오아포에 수군만호진을 구축한 것이다. 수군만호진은 세조11년 경상우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한다. 경상우수군은 경상우도 해안 방어가 목적이었다. 태종이 재편성한 수군이었다. 창원 현이 본진이었다. 그러나 남해안과 멀어 신속한 출동이 어렵자 오아포로 옮겨온다. 성종 원년(1470년) 거제 해안 7곳에 진이 구축된다. 거제가 남해안 왜구방어에 명실 공히 군사전략적 요충지가 된 것이다. 성종 19년(1488년) 6월 마침내 오아포 남쪽 가배량에 성곽을 축조한다. 이 성곽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가배량진성이다.

오아포는 임진왜란때 전략적 요충지가 된다. 초기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이순신은 통영 앞바다 섬 한산도에 통제영을 구축한다. 그리고 동쪽 가배량성을 규모가 더 크고 튼튼하게 쌓는다. 우수영성에 전략적 방어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그런데 전란 중 이순신은 모함으로 갑자기 파직된다. 이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원균은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오아포로 옮긴다. 가배량성은 약 7개월간 통제영성이 된다. 그러나 원균은 무리한 출전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다.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한다. 이순신은 호남 방어를 위해 통제영을 고하도, 고금도로 옮긴다. 전란 후 통제영은 고성현 춘원포를 거쳐 선조 37년(1604년) 두룡포 즉 오늘날 통영에 자리 잡는다. 오아포에는 고성 수군만호진이 옮겨온다. 가배량성은 다시 가배량수군만호진성이 된다.

가배량성은 가배리에서 해안을 향해 있다. 계곡을 낀 구릉을 따라 쌓은 포곡식 성곽이다. 초기 둘레 1,574m 체성 높이 4m, 폭 4.5m 석성이었다. 규모가 군사요충지답게 치소였던 사등성이나 고현성보다 크다. 둘레도 거제 전역 성곽 중 가장 길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무너지고 체성 140여m만 남아 있다. 형태는 북서쪽을 향해 팔을 벌린 형태다. 체성은 민가가 있는 북서쪽과 농장이 차지한 북동쪽이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남쪽은 차량 한 대가 다니는 좁은 농로와 접해 있다. 성벽은 안팎에 석축을 쌓고 내부를 흙과 돌로 채웠다. 협축식이다. 자연석 평탄면을 바깥으로 내어 수직 벽을 쌓았다. 적이 기어오르기 어렵도록 한 것이다. 하단부는 굵고 무거운 성돌 위주로 쌓았다. 위로 갈수록 가볍고 작은 성 돌을 쌓았다. 서, 남쪽에는 호(壕)가 있다. 군사들이 은닉해서 공격하는 시설이다. 측면 공격용 치성은 축성 당시 7기나 두었다. 그러나 6기는 무너져 위치 비정이 어렵다. 현재 확인 가능한 치성은 남쪽 체성 남문 터 바로 옆 1기뿐이다. 치성은 일반 읍성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형태는 정육면체에 가깝다. 성문과 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다. 성문 바로 옆이라 옹성 역할도 겸했을 것같다. 이 성이 고도의 전략적 방어시설임을 보여준다. 체성 끝 각 진 지점에는 각대 터로 보인다. 각대 또한 동, 남쪽 성벽을 공격하는 외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구조다. 성문은 네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 서, 북문은 터조차 없다. 북문 또는 동문은 군선 접안을 고려하면 가배 항 선착장 부근일 것이다. 동문과 서문은 주택 또는 경작지로 변해 위치 비정이 어렵다. 남문 터는 남쪽 체성 중간쯤 성벽이 없고 지대가 낮은 지점일 것이다. 이곳에는 무사석 등 지대석이 나뒹굴고 있다. 터 좌우 체성위에는 굵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이 수백 년쯤 된 소나무로 보인다. 아마 축성 당시 심었을 것이다. 남문 터를 넘어서면 북쪽은 성 안이다. 들어서니 온통 잡목과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내벽 일부는 길고 높은 수직 벽이다. 그러나 무너진 토석 혼축이 많아 구별이 어렵다. 체성 안에서 북쪽 여러 갈래 숲길을 따라가면 가배 항과 이어진다. 마을 안에는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조선시대 관아 동헌과 내아, 객사, 포도청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불에 타거나 민가가 차지해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다만 관아는 주초석이 남아 터로만 추정할 뿐이다. 체성 밖 서남쪽에는 땅을 파 만든 인공해자 흔적이 있다. 해자는 폭 10m, 깊이 2.5m 가량 돼 보이지만 수풀과 잡목으로 본래 위치 가늠이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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