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배량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배항 |
▲ 남쪽 체성 전경 |
▲ 남쪽 체성과 붙은 치성 |
▲ 남쪽 체성에서 바라본 덕원해수욕장과 율포만 |
▲ 동남쪽에서 바라본 체성 전경 |
▲ 서쪽 각대에서 바라본 체성위 전경 |
▲ 남쪽 체성에서 바라본 덕원해수욕장과 율포만 |
▲ 수풀에 쌓인 해자 유적 |
▲ 옛모습대로 남아 있는 남쪽 체성 |
오아포는 임진왜란때 전략적 요충지가 된다. 초기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이순신은 통영 앞바다 섬 한산도에 통제영을 구축한다. 그리고 동쪽 가배량성을 규모가 더 크고 튼튼하게 쌓는다. 우수영성에 전략적 방어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그런데 전란 중 이순신은 모함으로 갑자기 파직된다. 이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원균은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오아포로 옮긴다. 가배량성은 약 7개월간 통제영성이 된다. 그러나 원균은 무리한 출전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다.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한다. 이순신은 호남 방어를 위해 통제영을 고하도, 고금도로 옮긴다. 전란 후 통제영은 고성현 춘원포를 거쳐 선조 37년(1604년) 두룡포 즉 오늘날 통영에 자리 잡는다. 오아포에는 고성 수군만호진이 옮겨온다. 가배량성은 다시 가배량수군만호진성이 된다.
가배량성은 가배리에서 해안을 향해 있다. 계곡을 낀 구릉을 따라 쌓은 포곡식 성곽이다. 초기 둘레 1,574m 체성 높이 4m, 폭 4.5m 석성이었다. 규모가 군사요충지답게 치소였던 사등성이나 고현성보다 크다. 둘레도 거제 전역 성곽 중 가장 길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무너지고 체성 140여m만 남아 있다. 형태는 북서쪽을 향해 팔을 벌린 형태다. 체성은 민가가 있는 북서쪽과 농장이 차지한 북동쪽이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남쪽은 차량 한 대가 다니는 좁은 농로와 접해 있다. 성벽은 안팎에 석축을 쌓고 내부를 흙과 돌로 채웠다. 협축식이다. 자연석 평탄면을 바깥으로 내어 수직 벽을 쌓았다. 적이 기어오르기 어렵도록 한 것이다. 하단부는 굵고 무거운 성돌 위주로 쌓았다. 위로 갈수록 가볍고 작은 성 돌을 쌓았다. 서, 남쪽에는 호(壕)가 있다. 군사들이 은닉해서 공격하는 시설이다. 측면 공격용 치성은 축성 당시 7기나 두었다. 그러나 6기는 무너져 위치 비정이 어렵다. 현재 확인 가능한 치성은 남쪽 체성 남문 터 바로 옆 1기뿐이다. 치성은 일반 읍성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형태는 정육면체에 가깝다. 성문과 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다. 성문 바로 옆이라 옹성 역할도 겸했을 것같다. 이 성이 고도의 전략적 방어시설임을 보여준다. 체성 끝 각 진 지점에는 각대 터로 보인다. 각대 또한 동, 남쪽 성벽을 공격하는 외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구조다. 성문은 네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 서, 북문은 터조차 없다. 북문 또는 동문은 군선 접안을 고려하면 가배 항 선착장 부근일 것이다. 동문과 서문은 주택 또는 경작지로 변해 위치 비정이 어렵다. 남문 터는 남쪽 체성 중간쯤 성벽이 없고 지대가 낮은 지점일 것이다. 이곳에는 무사석 등 지대석이 나뒹굴고 있다. 터 좌우 체성위에는 굵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이 수백 년쯤 된 소나무로 보인다. 아마 축성 당시 심었을 것이다. 남문 터를 넘어서면 북쪽은 성 안이다. 들어서니 온통 잡목과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내벽 일부는 길고 높은 수직 벽이다. 그러나 무너진 토석 혼축이 많아 구별이 어렵다. 체성 안에서 북쪽 여러 갈래 숲길을 따라가면 가배 항과 이어진다. 마을 안에는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조선시대 관아 동헌과 내아, 객사, 포도청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불에 타거나 민가가 차지해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다만 관아는 주초석이 남아 터로만 추정할 뿐이다. 체성 밖 서남쪽에는 땅을 파 만든 인공해자 흔적이 있다. 해자는 폭 10m, 깊이 2.5m 가량 돼 보이지만 수풀과 잡목으로 본래 위치 가늠이 어려워 보인다.
강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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