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 옆 옛 석조 우물

   
▲ 논밭둑처럼 보이는 남쪽 성벽 기단석

   
▲ 동남쪽 성벽 하단부 거대한 기단석

   
▲ 동쪽 무너진 성벽 하단부

   
▲ 동쪽 성벽 하단부 기단석

   
▲ 동쪽 성벽밖 전경

   
▲ 민가 담장이 된 서남쪽 성벽

   
▲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 동쪽 성벽 바깥 전경

   

   
▲ 채소밭 둑처럼 보이는 성벽위 모습

  경남 거제는 고대부터 농, 어업이 발달했다. 토지가 비옥하고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농, 수산물이 풍부해 선사 이래 인류가 거주했다. 그러나 신라 이후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탈이 잦았다. 가장 극심했던 고려 원종12년(1271년)에는 거제현을 거창군 가조현으로 옮기고 백성을 이주시키는 일까지 빚는다. 150여년이 지난 조선 세종1년(1419년) 왜구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한다. 약탈이 잠잠해지자 현 치소를 옮겨온다. 흩어진 백성은 여덟 차례 단계적으로 이주시킨다. 이 무렵 해안 군사 요충지마다 왜구를 감시, 방어하는 군진을 설치한다. 이 군진이 영등포진, 장문포진, 조라포진, 옥포진, 율포진, 지세포진, 오아포진 등 ‘거제7진’이다.

이 무렵 율포진성 터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에 있다. 초기 율포진은 문종 원년(1450) 도체찰사 정분의 장계로 옥포와 영등포(구. 영등포를 뜻함) 사이에 세운 목책이 그 출발이다. 영등포와 옥포가 서로 멀어 율포에 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후 조정은 수군 방어 전략을 다시 짠다. 이때 초전 참패한 경상좌수영(부산) 산하 군진을 경상우수영(통영) 중심으로 이전한다. 거제도의 경우 해안가 율포진, 조라포진, 영등포진 등을 군사전략상 유리한 위치로 이동한다. 율포진은 현종5년(1664년) 현 거제시 동부면 율포리로 옮긴다. 이후 숙종14년(1688년) 가라산을 거쳐 경종4년(1724년) 다시 현 위치로 되돌린다. 이때부터 장목면 율포리( 현 율천리) 군진은 구. 율포진, 동부면 율포리 군진은 신. 율포진으로 구분하게 된다. 두 곳 지명이 모두 율포리여서 혼란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여기다 확실한 구분을 위해 장목면 율포리는 뒷산과 앞 하천(溪川) 이름을 따 ‘율천리’로 다시 바뀐다.

초기 율포진성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기록돼 있다. ‘고현(현 거제읍) 동쪽 33리 석성이며 둘레 900척, 높이 13척이다. 우물 1기, 하천이 흐르며 권관(조선시대 변방에 둔 종 9품 무관)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이 때 이미 튼튼한 성곽이 존재했던 것이다. 현재 성곽은 규모나 형태, 축성방식 등으로 미뤄 조선 성종(1470~1494)때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거제군지’에는 숙종14년(1688년) 통제사 이세현이 재수축을 건의한 뒤 17∼18세기 쌓았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 잔존 성벽이 초축이 아닌, 재수축이었던 것이다. 규모는 둘레 약 550m, 높이 3m, 폭 4m로 전해진다. 본래 4대문을 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남, 북문은 홍예문에 성루가 있었다고 한다. 성문 밖에는 옹성을 두었고 ‘ㄱ’자 형이었다. 외적 방어에 유리한 형태다.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 장수 이영남(1563~1598)이 지휘했다고 전해진다. 바로앞 율포만은 1592년 7월 15일 이순신 함대가 왜선 7척을 포착, 3척을 불사른 해전장이다.

◇답사=율천리는 경남 거제시 연초면 명동마을에서 장목면 소재지로 가다 만난다. 남동쪽 바다를 향해 앉은 마을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를 매립하기 전 마을 앞 하천까지 바다였다고 한다. 남동쪽은 바다와 이어져 있다. 해전에 언제나 출동이 가능하고 방어에 유리한 입지로 파악된다. 진성은 대체로 비좁은 평지여서 평지성으로 분류된다. 성 안팎은 대부분 민가 채전이 차지했다. 진성 입구 논밭 둑이나 안길 축대를 성벽에서 빼낸 돌로 쌓은 듯하다. 마을 앞에서 잔존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남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쳐있다. 상단은 거의 붕괴됐지만 하단이 튼튼한 옛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조선 초기 축성양식 읽혀지는 성벽이 나타난다. 하단부터 지름 1m가 넘는 거대한 기단석을 촘촘하게 쌓았다. 위로 가면서 바깥을 평면으로 맞춰 성 돌을 쌓고 잡석을 끼워 견고성을 더했다. 원형에 가까운 초기 형태도 없지 않다. 반드시 보존해야 할 조선 전기 성벽이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 오량성과 고현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문 터 밖을 나서면 폐기된 큰 원형 우물이 있다. 성안에서 군사들이 물을 길어다 사용했을 것이다. 북서쪽 마을 안길을 돌아 다시 남문 방향으로 나오면 한 바퀴 다 돈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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