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곡과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 계곡옆 원형 성벽

   
▲ 대나무숲속 목장성 성벽

   
▲ 동쪽 계곡따라 쌓은 성벽

   
▲ 목장성 추정 낮은 성벽

   
▲ 무너지고 남은 성벽 하단부

   
▲ 북쪽 성벽 바깥쪽 전경

   
▲ 붕괴가 진행중인 성벽

   
▲ 성안 건물 터 축대

  경남 남해군은 남해도와 창선도 두 섬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은 남해대교 등으로 이어져 육지나 다름없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섬 안 곳곳에 분포해 있다. 내륙지방 못지않게 일찍이 사람이 살았던 것이다. 신라 신문왕10년(690년) 전야산군을 두었고 35대 경덕왕16년(757년) 현 지명 남해군이 된다. 남해는 당대 섬인지라 백성들은 왜구의 약탈에 자주 시달렸다. 해안가 영현 난포, 평서산현은 더욱심해 평온한 삶을 영위하지 못했다. 고려 현종9년(1018년) 인구가 줄어 행정단위도 ‘군’에서 ‘현’으로 강등된다. 마침내 공민왕 7년(1358년) 관아를 내륙 진주목 대야천 부곡(현 경남 하동군 북천면)으로 옮긴다. 백성들도 함께 떠나 섬은 공도가 된다. 관아가 되돌아온 시기는 46년만인 조선 태종4년(1404년)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지리적 환경이 왜구의 출몰에 고스란히 노출된 탓이었다. 남해가 일찍이 왜구를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부상한 이유다. 고대 남해는 고을 ‘현’단위로 쌓은 관방성이 많다. 평산현 고성, 난포형 고성, 성고개 고성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 태종4년 관아가 복귀하면서 현령 임덕수는 남해읍성을 우선 쌓는다. 남해도의 대표적인 치소성이 바로 이 읍성이다. 이후 조선 성종 대 본격 관방성을 쌓기 시작한다. 남쪽 앵강만 등 왜구의 잦은 출몰지가 중심이었다. 이시기 축성은 고대 성곽의 개축이나 보강 위주였다. 그중 치소성으로 여겨지는 금오산성과 대국산성은 대표적인 재수축 산성이다. 조선 중종 대 삼포왜란이 발발한다. 이후 ‘진’과 ‘보’ 등 보다 적극적인 군사적 방어망이 갖춰진다. 남해도의 경우 곡포진성, 상주포진성, 평산포진성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남해에는 관방성만이 아닌 목장성과 왜성 등이 있다. 그중 남해장성은 매우 특이한 성곽으로 주목받는다. 말 목장 기능과 함께 관방성 역할을 했을 것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장성은 주로 국경이나 도성 외곽을 방어하는 성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해장성은 이름만 장성일 뿐 외적 침범 대비와 함께 형태나 구조 위치를 보면 말목장성 성격이 짙다. 특히 평지성의 경우 성벽이 사람 키보다 낮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조선 후기 경상도 남해현과 진주목 목장지도에도 ‘마성’으로 등장한다. 또 ‘축마비’에도 말목장성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축마는 말들을 내쫓았다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조선 효종 대 창선도 말 100필을 금산과 동천으로 옮긴다. 그러나 감목관들이 백성의 땅을 빼앗아 논밭을 파헤치고 소나무를 불태우는 등 피해가 심해진다. 이에 조정은 1655년 말을 창선도로 되돌려 보내고 말 목장을 혁파한다. 그런데 1705년 세운 ‘관방성비’에는 난포에서 추전해변까지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남해를 동, 서로 나눠 외적을 방어했던 시기다. 성벽의 방향도 두 섬의 목 부위를 지키며 서남쪽 앵강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를 통해 남해장성이 관방성 역할을 충분히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지대가 높아 유사시 입보산성으로도 지금 시각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

◇답사 = 남해장성은 해발293m 등백산 북쪽 자락 경남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에서 시작한다. 체성은 거의 무너졌지만 터는 북쪽 영지리까지 이어진다. 남서쪽에 앵강만을 끼고 있다. 해상에서 외적을 방어하다 패퇴할 경우 이에 대비한 2차 방어선으로 볼 수 있다. 길이는 무려 15km에 이른다. 산자락과 계곡을 따라 쌓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 형체는 현재 약 8km 남아 있다. 성곽이 옛 형태는 남해군 이동면 금평리 마을 뒤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마을 앞 남해대로(77번국도)에서 등백산 방향 고샅길을 가로질러 오른다. 그렇지 않으면 왼쪽 대나무 숲을 따라가도 된다. 두 지점 끝에 사람 허리 키 높이 성벽이 나타난다. 성벽은 산자락을 휘감으며 북쪽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안쪽에 산복도로가 트여 있다. 왼쪽숲속에 성벽이 이어진다. 가까이 바라보며 걷기가 수월하다. 아마 옛 성곽의 회곽도일 것이다. 축성방식은 주위 흔한 자연석을 차곡차곡 정교하게 쌓았다. 길게 쌓았지만 높이는 그리 높지 않다. 유사시 방어목적이 아닌 성곽(목장)으로 파악된다. 산복도로는 성벽 안팎을 넘나드는 계곡물로 인해 유실이 심하다.

마을이 가까운 성 안 부지는 군데군데 채전이 개발돼 있다. 정확한 형태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성벽이 마치 무너지지 않은 돌담처럼 보인다. 물론 옛 모습 그대로인 곳도 적지 않다. 산속으로 들어 갈수록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그런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성벽 폭이 1m 넘는 두껍게 쌓은 구간도 있다. 마을은 성 안에 해당한다. 뒤에 대지를 떠받친 높은 석축이 보인다. 너른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이다. 분명 옛 건물 터로 짐작된다. 하지만 발굴하지 않고선 확인이 어렵다. 바로 인근 고목 아래 마치 돌담처럼 옛 성벽이 서 있다. 초기축성 당시 굳건한 형태 그대다. 자세히 보니 매우 짜임새가 있다. 이끼가 끼었지만 견고함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계곡물이 아랫도리를 스치며 흐른다. 아무리 봐도 붕괴된 흔적은 전혀 없다. 마을 동쪽으로 나오면 다시 대나무 숲이다. 숲속에 옛 모습을 간직한 성벽이 줄지어 서 있다. 무척 경이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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