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목 객사 금성관 정문 망화루

   
▲ 금성관앞 마당

   
▲ 나주목 관아정문 정수루

   
▲ 남고문

   
▲ 동문 동점문

   
▲ 북문 북망문

   
▲ 서문 영금문

   
▲ 석당간

   
▲ 읍성안 나주천

   
▲ 나주향교 명륜당

  전라남도 나주(羅州)는 원삼국시대 마한 54개국 가운데 불미국(不彌國)이었다. 삼국시대 마한은 백제에 정복된다. 불미국도 백제 땅 발라군(發羅郡)이 된다. 삼국통일전쟁으로 백제가 멸망한다. 발라군은 당의 웅진도독부 대방주(帶方州)가 된다.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몰아낸다. 그리고 전국을 9주로 재편한다. 이때 발라군은 주(州)로 승격, 전남 일대를 관할한다. 이후 신라 신문왕 6년(686년) 통의군(通義郡), 경덕왕 16년(757년) 금성군(錦城郡) 또는 금산군(錦山郡)으로 바뀐다. 후삼국시대 견훤이 차지해 후백제 땅이 된다. 그러나 후고구려 궁예의 부하 왕건이 빼앗는다. 식량과 군량미를 공급하는 나주평야를 빼앗긴 후백제는 급격하게 약화된다. 이를 계기로 왕건은 북쪽 궁예의 영향권을 벗어난다. 아울러 후삼국 통일과 새 왕조 건국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 때 나주 호족 오다련의 도움이 컸다. 왕건은 오다련의 딸(후일 장화왕후)과 혼인을 맺는다. 장화왕후는 2년 뒤 아들을 낳는다. 그가 ‘무’로 고려 2대왕 혜종이다. 나주가 고려왕조 개창을 도와 왕을 배출한 것이다. 나주는 이 시기부터 역사서에 본격 등장한다. 고려 성종2년(983년)은 전국에 십이목(十二牧)을 둔다. 나주도 목(牧)이 돼 정3품 목사(牧使)가 부임한다. 12목은 고려 현종 때 8목으로 정비된다. 나주목은 고려, 조선조, 구한말까지 1,000년 가까이 존속한다. 다만 1895년 전국 23부제 개편 때 나주부(府)가 된다. 조선조에는 ‘작은 한양(小京)’이라고 불리었다. 규모는 한양 도성보다 작지만 모양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나주는 지금도 ‘목사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나주에는 국내 읍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는 나주읍성이 있다. 나주시 금남동, 성북동, 과원동 일대를 차지한다. 나주는 삼국시대 말 후삼국시대 태동한 지방 거점 고을이다. 읍성도 이 시기 축성했을 것이다. 통일신라 판축기법 토성 축조가 성행하던 때다. 나주는 고려왕조에서 전라도를 관할하는 군사행정 치소(治所)가 된다. 고려 8대 현종 1년 (1010년) 거란이 침입한다. 왕이 나주로 몽진길에 오른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혀진다.

조선조 농, 산업 발전으로 전라도는 인구가 급증한다. 나주읍성의 군사행정 치소 기능도 강화된다. 여기다 왜구의 빈번한 침략으로 방어기능이 더해진다. 태종4년(1404년) 7월 왜선 33척이 전라도 해안 약탈을 자행한다. 조선 수군은 이를 격퇴한다. 이때 재침을 막기 위해 토성인 나주읍성은 다시 석성으로 수축하게 된다. 이는 불과 3개월 만에 이뤄진다. 언제 또 다시 침입해올지 상존하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나주는 해안가 왜구 방어 군사전략 기지가 된다.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3,126척(940m) 높이 9척(2.7m)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 대 국방력 강화 차원에서 규모를 더 늘린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규모는 둘레 약 3.7km 면적 97만 2,600㎢로 더 커진다.
세조 3년(1457년) 체성과 내부시설이 재정비된다. 오늘날 읍성 형태가 이때 거의 갖춰진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또 다시 수축이 이뤄진다. 나주읍성은 전형적인 평지성이다. 다만 북벽과 남동쪽 성벽만 일부 구릉을 이용했다. 형태는 네모꼴을 약간 벗어난 긴 타원형이다. 내벽은 흙으로 경사지게 쌓았다. 외벽 형태는 기어오르기 힘든 수직 벽이다. 전형적인 조선조 축성방식이다. 대포를 쏘는 포루도 3곳이나 만든다. 읍성 안에는 우물 20여 곳, 샘 12곳을 두었다. 4대문도 냈다. 동점문(東漸門), 영금문(映錦門 또는 서성문), 남고문(南顧門), 북망문(北望門) 등이다. 성문마다 옹성을 둘렀다. 성벽 옆에 돌출 치성 7곳, 위에 여장(女墻 성벽 위로 낮게 쌓은 담장)을 쌓았다. 물을 흘러내 보내는 수문도 두 곳 냈다. 성벽은 하단 장방형 성 돌 위로 자연석을 할석을 끼워 지탱하며 쌓았다.

나주읍성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격전지가 된다. 농민군은 나주 북쪽 금성산에 진을 친다. 그리고 서쪽 성벽을 향해 두 차례 공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하면서 3천 여 명 사상자만 낸다. 이후 네 차례 더 끈질긴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전투는 관군의 승리였다. 전투사를 새긴 금성토평비가 객사 마당에 서 있다.

읍성은 일제강점 초기 1910년부터 1920년 사이 4대문과 성벽이 빠르게 훼손된다. 그리고 식민 통치를 위한 금융조합 등이 성 안에 들어선다. 해방 후 도로 건설과 도시화로 훼손은 더욱 심해진다. 지금은 민가 담장이 된 교동 서쪽 성벽과 중앙초등 뒤 북벽, 중앙동 하천 옆 동벽 등이 약간 남아 있다. 고지도에는 동헌 제금헌을 비롯한 옛 관아 건물이 즐비하다. 십자형 도로가 건물끼리 잇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나마 객사 금성관, 관아 정문 정수루, 목사 내아 금학헌 등이 남아 있다. 금성관은 위용이 돋보이는 건물로 나주의 자랑거리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이다. 정수루는 선조 36년(1603년) 목사 우복용이 지었다. 큰 북이 매달린 누각위에 서면 읍내가 훤하게 보인다. 내아는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과 목사 민종렬이 담판을 나눈 장소로 유명하다. 나주목사를 지낸 학봉 김성일 선생도 거주했다.

나주읍성은 2000년 대 이후 복원이 시작된다. 이에 금성관 좌우 동익헌, 서익헌, 객사아문이자 정문 누각 망화루, 그 뒤 중삼문, 객사 우물 등이 잇따라 복원됐다. 또 1993년 복원된 남고문에 이어 2005년 동점문, 2011년 영금문, 2018년 북망문 등 4대문도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남고문은 2층 누각 앞면 3칸 옆면 2칸 건물이다. 지붕은 여덟 팔(八)자 팔작지붕이다. 동점문은 나주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나주는 지형이 배를 빼닮았다. 이에 돛을 형상화한 석당간을 세운다. 이 당간은 동점문 밖에 서 있다. 동점문은 강을 방어하는 군사전략적 위치다. 영금문은 금성관 서쪽에 자리한 단층 누각 성문이다. 본래 서성문이었으나 1800년대 나주목여지승람에는 영금문으로 표기돼 있다. 영금문 밖에는 국내 가장 규모가 크다는 나주향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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