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대도호부관아 정문 누각

   
▲ 공민왕이 쓴 임영관 편액

   
▲ 관아 칠사당

   
▲ 임영관

   
▲ 중대청(앞)과 임영관(뒤)

   
▲ 강릉읍성 동쪽 도로변 복원 성벽

   
▲ 객사문 동쪽 복원한 성벽

   
▲ 서쪽 복원 성벽 안쪽 전경

   
▲ 객사문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성벽

   
▲ 강릉읍성 객사문(임영관 삼문)

  강원 강릉은 영동지방 중심지다. 태백산맥 넘어 영서지방을 잇는다. 군사 전략적 교통요지다. 고대 동예 부족국가 도읍으로 비정된다. B.C129년 위만조선에 속한다. 이듬 해(128년) 위만조선 군장남려가 우거왕을 배신하고 전한에 귀부한다. 한 무제는 위만조선 멸망 후 한사군을 설치한다. B.C108년 임둔군으로 개편한다. 이 무렵 A.D60년 남쪽 실직국(현 삼척시)을 공격해 실직국 안일왕은 울진까지 몽진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고구려 미천왕14년(313년) 이곳을 점거한다. 이때 지명은 하슬라 또는 하서량 이다. 4세기 말 고구려는 하슬라를 다시 신라에 빼앗긴다. 5세기 중반 나물 마립간 아들 눌지 마립간 때 하슬라성을 쌓다. 신라의 북쪽 전선으로 군사요새가 된 것이다. 5세기 중, 후반 장수왕이 실직국을 공격한다. 이 때 실직국 북쪽 하슬라성도 다시 고구려 땅이 된다.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고구려와 신라 간 국경 분쟁이 사라진다. 신라 땅이 되면서 고구려와 대치하는 최전선이 된 것이다. 이때 군주가 이사부 장군이다. 그는 512년 우산국을 정복한다.

아슬라 또는 하슬라는 ‘큰 바다’ 또는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을 뜻한다. 강릉은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고장이다. 신라 법흥왕 10년(523년) 군사령부격인 하서정을 설치한다. 군사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9주 5소경 중 하나인 ‘하슬라서소경’으로 격상시킨다. 그리고 정복 전쟁 유공자들을 집단 이주시킨다. 투항해온 주변국 백성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무열왕5년(658년) 다시 아슬라‘주’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도독’을 파견하고 군사력을 강화한다. 이번에는 북쪽 말갈족과 잦아진 분쟁이 그 이유였다. 아슬라주가 동해안 진출 군사거점이 된 것이다. 아슬라주는 신라 경덕왕16년(757년) 한문 지명 ‘명주’로 거듭난다. 신라 후기 원성왕과 왕위다툼에서 밀려난 김주원 후손들이 대대로 호족이 돼 다스린다. 김주원은 명주군왕으로 추대돼 사후 강릉에 묻힌다. 지금도 거대한 명주군왕능이 강릉에 있다.

후삼국시대 명주는 호족 ‘순식’이 다스린다. 순식은 양길과 싸우는 궁예 편을 든다. 그러나 궁예가 축출된다. 순식은 왕건에게 저항했지만 끝내 굴복한다.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하사한다. 이후 강릉은 임영, 동원경, 명주, 하서부, 명주도독부, 명주목, 경흥도호부, 강릉대도호부 등으로 이름과 읍격이 자주 바뀐다. 고려 성종11년(992년) 명주도독부를 명주‘목’으로 승격시킨다. 오늘날 ‘시’급에 해당한다. 공양왕1년(1389년) 강릉은 행정에 군사적 기능이 강화된다. 강릉대도호부로 읍격을 높인 것이다. 조선 초기 지방행정을 개편한다. 조선 지방 행정단위는 주, 부, 군, 현이었다. 그러나 강릉은 ‘대도호부’를 그대로 유지한다. 이는 조선조 내내 강릉대도호부로 존속한다. 조선 후기 1775년 우계현, 연곡현을 병합한다. 1789년 다시 강릉부가 된다.

강릉에는 지금도 강릉읍성 터가 남아 있다. 위치는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객사 임영관 주변이다. 초축은 고려 태조19년(936년)이며 객사 임영관과 함께 83칸 건물을 짓는다. 그러나 읍치 기능은 이보다 오래전이어서 읍성 존재 가능성은 크다. 현종20년(1029년) 동여진 해적의 출몰이 잦아진다. 그간 경상, 전라, 충청 등 삼남을 유린하던 왜구들도 강릉 해안까지 올라온다. 이들의 약탈은 공민왕6년(1357년) 6월 첫 침입은 우왕8년(1382년), 우왕9년(1383년) 연거푸 이어진다. 이때 성곽을 수축한다. 증,개축은 조선조까지 이어진다. 조선 문종1년(1451년) 둘레 3,720척으로 확장한다. 60년 후 중종7년(1512년) 2,782척 규모로 개축한다. 영조1년(1725년) 남문과 서문 사이 성벽을 다시 쌓는다. 이때는 외적보다 남대천 잦은 범람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읍성 안에는 조선 후기까지 내아와 부속건물 외아 등이 있었다. 칠사당, 신민당, 전랑, 공수청 등과 향청, 장관청, 군관청, 군기고, 작청, 부사, 사령방, 관노방 등이다. 그밖에 누각, 사대, 형옥, 성황당, 빙고, 책실 등도 있었다. 물론 연못과 우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건물은 일제 강점기 성벽과 함께 철거된다. 형태가 남은 옛 건물은 내아 칠사당과 객사 임영관, 객사문 등이다. 임영관은 장기간 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경찰서가 차지한다. 이때 부재는 뜯겨나가 오성정, 월화정, 방해정 등 전각에 재사용된다. 최근 경찰서가 옮겨가 2012년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어 아문, 동헌, 별당, 누각 의운루 등도 새로 지어졌다. 객사문 공양왕 친필 편액도 임영관으로 옮겨단다. 그리고 임당동 일대 성벽을 복원한다.

체성 둘레는 1.9km 가량이다. 형태는 동남쪽 남대천을 바라보는 마름모꼴이다. 남대천은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에서 발원해 시가지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든다. 성벽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구간은 해람중학교(구 강릉여중), 명주예술마당(구 명주초등), 강릉관광호텔, 서부시장, 남문 터 어풍루(파랑달협동조합)를 잇는다. 현재 외곽 성벽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읍성 안 임영관과 객사문 주변, 그리고 동쪽 도로 변에 복원된 성벽만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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